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느니라
'Man with a Van'은 영국의 이사업체다. 그곳에 전화해서 이사를 문의했다. 계획대로라면 국제운전면허증을 가져온 내가 적당한 승용차를 렌트하여 직접 짐을 날라야 했다. 그건 좀 힘든 일이었다.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집어 먹은 것은 이층 버스의 이층 맨 앞자리에 앉아 운전 시뮬레이션을 해 본 뒤였다. 삼십 년 넘게 우측운전에 익숙해진 뇌는 회전을 할 때 아득하니 어지러워졌다. (영국은 좌측운전) 몇 번의 구토증세를 느끼고 나서 포기했다. 그냥 돈을 좀 더 쓰기로 했다. 병원에 누워있는 것보다는 저렴할 거니까.
돈만 좀 더 쓰면 될 줄 알았다. 작은 Van에 운전하는 Man 옆에 앉아 짐과 함께 런던에 구해 둔 집으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평화롭게 여행하듯이. 착각이었다. 픽업시간을 정하는 것부터 이국적이었다. 시간을 콕 찍어 약속을 정하면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가장 싼 선택은 아침 8시에서 오후 4시 사이에 픽업하는 것이다. 몇 시에 올진 모른다. 4시에 픽업하면 너무 늦을 것 같아 8시에서 정오사이로 계약을 했다.
아침 10시에 거대한 컨테이너 트럭이 왔다. 뒷문을 여니 이미 다른 사람의 짐이 실려있다. 아, 이 트럭 하나가 여러 고객의 짐을 차례차례 싣고 가서 차례차례 내려주는 시스템이구나. 야무지게 포장된 딸의 짐이 떠났다. 런던에서 무사히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우리는 요크에서 기차를 타고 따로 런던으로 갔다. 키도 크고 근육도 좀 있는 젊은 드라이버는 싱긋 웃으며 4시 30분 정도에 만나자고 했다. 영국인은 그런 식으로 '농담'을 했다.
4시 30분에 런던의 집에서 기다렸다. 트럭대신 전화가 왔다. 좀 늦어져서 6시 반정도에 도착한단다. 그 정도도 괜찮다. 짐을 내려놓고 저녁을 먹으러 가면 되겠다, 생각했다. 6시경에 온 전화 너머에서는 8시 반에 도착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살짝 허탈한 웃음이 터졌지만 뭐, 영국이니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하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저녁을 미리 먹고 오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뉴몰던으로 나가서 순두부찌개와 김치볶음밥을 사 먹고 후딱 돌아왔다. 8시 반이 되었는데 트럭도 오지 않고 이번엔 전화도 받지 않는다.
딸은 초조하게 전화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데, 피로와 식곤증이 몰려온 나는 시트도 깔지 않은 침대 모서리에 모로 누운 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웅성이는 소리에 나가보니 1층 좁은 복도에 짐이 가득하다. 딸은 이불을 꺼내 침대를 만들어주더니, "엄마는 그냥 자.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내일 정리하면 돼." 한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다음날 들은 이야긴데, 트럭 드라이버는 애를 태우다 10시쯤 전화를 받았다. 곧 도착한다고 했지만, 결국 11시 반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튼튼한 체격에 피로한 기색도 없이 명랑했고, 예상보다 훨씬 늦은 것에 대해 미안해 하기는커녕 리뷰를 써달라며 윙크를 날렸다. 어이가 없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그래도 아직 한 집이 더 남았다는 말에 측은지심이 발동한 딸은 불평 한마디 못하고 준비한 에너지 드링크를 건네주고 환하게 웃으며 보냈다. 모든 게 완벽했다는 듯이.
한국이었으면 난리 났다고 '난리'를 친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영국에서 좀 살아 본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단다. 짐이 무사히 도착했으니 되었단다. 기다림에 익숙해진 건가. 그들이 뭐든 잘 기다리기는 한다. 식당에서도 안내를 받을 때까지 혹은 주문을 받으러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손을 들고 재축하면 '무례'한 행동이다. 난 '무례'하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몸을 비비 꼬며 참고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살면 몸은 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하고, 영국에 살면 몸은 좀 불편해도 마음은 편하다,는 말을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기대 수준' 때문이 아닐까. 영국에서는 상대에 대한 기대 수준이 매우 낮다. 서비스에 대한 수준도 매우 낮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아니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다 이해해 준다.
아마도 우리 짐을 싣고 온 드라이버도 힘들지 않게 왔을 것이다. 담배도 한 대 피우고, 식사도 느긋하게 하고, 커피도 여유 있게 마시면서. 짐도 천천히 내리고, 고객과 정다운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헤어질 땐 볼키스도 잊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니 집에서 좀 기다려도 될 것 같다. 식사도 못하고, 화장실도 참으면서, 시간 맞추려고 과속하며 진을 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불평하려 던 입이 쑥 들어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도 이 사람아! 7시간을 기다리게 한 것은 좀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