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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요정은 있다!

강력한 믿음의 초자연적인 힘

by 오드리

여행요정이라 함은 여행하는 동안 옆에서 보호해 주는 초현실적 존재를 말하겠지요. 믿는 사람도 있고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믿어요. 그 이유를 한번 증명해 볼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번 여행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여행을 떠나기 전날. 독감이 한창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호들갑을 떨고 있었고 마침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독감이라고 결근을 했지요. 그 전날까지 바짝 붙어 있었던 터라 걱정이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침부터 몸이 심상치 않았어요. 병원에 갔더니 독감이랍니다.


다음 날 아침에 영국으로 떠나야 한다, 고 했더니 의사가 그랬어요. 힘들 텐데요. 속도 안 좋아 한 달째 약 먹고 계시잖아요. 일단 독감 수액을 맞으세요. 9만 원입니다. 그리고 영국 가서 밀가루와 유제품, 과일은 절대 드시지 마세요.(그럼, 뭘 먹어요?) 수액을 맞고 시간이 빨리 가길 기다렸어요. 믿는 구석이 있었답니다. 이 나라만 떠나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르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이런 미신 같은 믿음은 어디서 온 걸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순간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답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진짜 거짓말처럼 비행기가 뜨고부터 말짱했어요.


기내식 아시죠. 먹기 힘들잖아요. 다행히 대한항공이라 짜 먹는 고추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두 번 나온 느끼한 식사를 순삭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음날 아침부터 허접한 잉글리시브랙퍼스트도 밀크티 한 사발과 함께 며칠을 먹었고, 기름진 피시 앤 칩스에 하물며 맥주도 마셨어요. 아무 문제도 없었고 소화제도 하나 먹지 않았답니다. 바리바리 싸 가져 간 양약과 한약은 거의 풀어보지도 않았다니까요.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네, 여행요정이 있다는 증거지요.


그것뿐인가요, 뭐. 킹스턴에서 슬라이딩을 했는데 그렇게 넘어지면 뼈를 다치던가 얼굴을 갈아 뭉개던가 할 수 있는데 손바닥과 무릎만 좀 까지고 멀쩡했잖아요. 요정이 밑에서 깔아주었을 겁니다. 라디에이터 하나로 난방을 하는 방에서 자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고, 하루 2만 보 이상의 강행군을 하며 다녀도 코밑이 허는 정도였지 몸살도 나지 않았어요. 불면증은 고사하고 코를 골며 잤다니까요. 자다가 깨지도 않았답니다.



2,30대에 혼자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짓을 순진하게 하고 다녔지요. 혼자 기차 타고 영국과 아일랜드를 일주할 때 에든버러에 밤늦게 도착해 숙소를 찾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자기가 태워다 주겠다 해서 '땡큐'하고 날름 올라타기도 하고 (유스호스텔까지 안전히 태워다 주심), 스페인어도 한마디 못하면서 멕시코 유카탄 반도 밀림 속에 숨어있는 피라미드를 찾아가기도 하고,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뉴욕 맨해튼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고 싸구려 호텔을 찾아가는 길에 레게 머리를 한 흑인이 자기 방이 위층이니 놀러 오라고 해서 복도 끝 공용 화장실도 못 가고 밤새 소변을 참기도 하고, 뉴멕시코의 시뻘건 황토사막을 혼자 운전해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어 해발 4500미터까지 올라갔다가 문이 다 떨어져 나간 구소련제 헬리콥터를 타고 히말라야 산맥을 둘러보고 내려오기도 했답니다.



매번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의 잠재의식 속 깊은 곳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믿음이 자리를 잡았지요. '여행 요정이 있다.' 그 믿음은 부정할 수도 없앨 수도 없지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이 땅에 있으면 위장약을 달고 사는 데 이 땅만 떠나면 뭘 먹어도 괜찮다니깐요. 감기도 한번 걸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로 늘 비상약은 챙겼지요. 이번에도 약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왔답니다. 이러니 어떻게 요정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겠어요.


사실, 요정 같은 것이 어디 있겠어요. 강력한 믿음의 힘이 아닐까 해요. 잠재의식에서부터 강하게 믿고 있으면 초자연적인 힘이 나오기도 하잖아요. 저는 그런 것이라 생각해요. 외국에 나가면 병원도 가기 힘들고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게 되고 몸도 알아서 도와주면서 하나의 믿음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이번 귀국길에는 여행요정을 데리고 들어왔어요. 마음에서 계속 여행 중이라고 생각을 하면 요정이 그런줄 알고 활동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여행 중이니 아프면 안된다, 고 주문을 넣는거죠. 그러고 보면 인생도 여행이고 아픈 것도 역시 마음에 달려있네요. 내 맘 속에 살고 있는 여행요정을 이번에 집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휴가 없이 부려먹어 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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