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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턴에서 슬라이딩

넘어져도 럭키비키

by 오드리

킹스턴은 런던 워털루역에서 기차를 타고 20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지역이다. BnB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나 기차를 탔을 때 늘 종착역이 킹스턴이라는 안내 방송을 들었다. 킹스턴은 그렇게 각인이 되어 있었다. 런던에서 이용한 대중교통의 안내 방송은 깔끔했다. '이번 역은 00이다. 다음 역은 00이다. 이 버스는 00행이다.' 아무런 광고 없이 세 가지 정보가 전부다.


기차에서는 불편함을 신고하라는 캠페인이 하나 더 있긴 했다. 'See it, Say it, Sorted.',라고 '발견하고 알리면 해결된다',는 의미다. 킹스턴에서 슬라이딩한 사연을 신고하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억지다. 그런 것도 해결해 주면 좋겠지만.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고, 딸은 지원한 직장의 온라인 인터뷰로 작은 BnB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합류하여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BnB의 매니저인 압둘에게 살이 부러진 까만 접는 우산을 빌려 뉴몰던으로 나갔다. 뉴몰던은 영국의 한인타운이다. 서울맛집, 강남집, 이모집, 한국문화연구회등 한글 간판이 눈에 띄고, 한국말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카페에 앉아 밀크티 한잔과 크로와상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기다릴 때 독서만 한 것은 없다. 약속에 늦는 친구도, 긴 기다림의 줄도 다 용서가 된다. 2시간이 흘렀다. 딸이 전화가 왔다. 인터뷰가 생각보다 훨씬 길어질 것 같으니 좀 더 기다리라는 것이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모험을 해야 할 시간이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절호의 기회였다. (결국 망했지만)


밖은 흩뿌리는 비에 바람이 심했다. 뉴몰던 역에서 기차를 타고 워털루역으로 갔다. 버스로 갈아타고 대영박물관으로 갔다. 구글맵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오래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이집트의 어느 골목을 그대로 떠서 옮겨 놓은 것과 유명한 로제타석에 대한 기억만 있다. 확인해 보자, 고 스스로 미션을 정했다.


대영박물관은 공짜다. 전 세계에서 '훔쳐다' 놓은 것에 대한 일말의 양심이라고 생각했다. 런던의 다른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도 공짜다. 문화적 해택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려는 의도라고 한다. 그 아름다운 의도를 믿기로 한다. 워낙 관광객이 많아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한 사람은 정문으로 입장을 하고,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온 사람은 건물 반대쪽으로 가서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하고 뒷문으로 들여보내준다. 입구에는 들고 들어가지 못한 플라스틱 음료수 잔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피로함이 몰려와 이집트관만 돌아보고 나왔다. 곧 깜깜해질 것 같았다.


이집트관에 있는 람세스상과 로제타석


워털루역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구글맵으로 정류장을 찾는데 방향이 분명치가 않다. 핸드폰을 내밀며 박물관 문지기에게 다가갔다. 덩치가 큰 인도계 남자분 둘이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소리친다. '핸드폰을 그렇게 들고 다니면 바로 소매치기당한다. 얼른 옷 안으로 넣어라.' 런던에서 핸드폰을 털렸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경고를 받고 나니 현실로 다가왔다. 런던은 보기보다 험한 곳이다.


정문에서 바라본 대영박물관


오후 4시가 지나면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런던


내릴 때는 몰랐는데 워털루역은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플랫폼이 24개나 되었다. 역시 증기기관차부터 시작한 역사는 남달랐다. 잠시 어리바리해졌다. 그럴 때는 묻는 것이 상책이다. 20분 뒤에 뉴몰던을 거쳐 킹스턴으로 가는 열차가 있었다. 플랫폼은 5분 전에 나오니 잘 지켜보라고 했다. 천장에 붙어 있는 게시판에 24번 플랫폼이라고 뜨자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들어갔다. 1번 플랫폼이 보인다. 숫자가 커지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길이 가로막힌다. 직원에게 물으니 다시 찍고 나오라고 한다. 24번은 저쪽 끝이니 뛰라고 한다. 뛰었다.


그때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킹스턴'과 '플랫폼 24'만 들렸다. 아, 킹스턴 가는 열차를 24번에서 타라는 말이구나 생각했다. 여기서 꼬이기 시작했다. 뭔가 변경이 있을 때만 방송을 하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킹스턴 가는 노선이 두 개가 있었다. 뉴몰던을 거쳐가는 짧은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긴 것. (그날 방송은 노선변경에 관한 것으로 짐작한다.)


안심하고 올라 탄 열차는 제시간에 출발했다. 20분 내에 도착한다고 한식당에서 만나자고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킹스턴행은 맞는데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는데 뉴몰던역 안내가 안 나온다. 런던외곽 열차앱은 필요가 없어 깔아 두지 않아 위치는 알 수가 없었다. 열차 안을 돌아보니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거기다 핸드폰 배터리도 거의 없었다.


건너편에 앉은 젊은 남자에게 물었다. 이 열차가 뉴몰던으로 가나요,라고.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 열차앱을 알려주며 깔아서 알아보라 하고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열차앱을 깔았다. 배터리가 훅 줄어들어 더 이상 진행을 못했다. 앞쪽에 앉은 인도인 커플에게 다가가 또 물었다. 여자가 핸드폰으로 찾아보더니, 잘못 탔다. 내려서 반대 방향으로 두 정거장을 가서 다른 열차를 타라,고 한다. 내가 물었다. 킹스턴으로 가는 열차라면 뉴몰던은 그곳에서 가깝지 않나요,라고. 다시 찾아보더니, 네 말이 맞다 킹스턴에서 열차를 타면 두 정거장이니 그게 낫겠다, 고 급히 알려주고 그들도 내렸다.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다 되어서 딸에게 전화했다. 열차가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지만 킹스턴에서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핸드폰은 먹통이 되었다. 워털루를 출발한 지 한 시간이 더 지났다. 열차 안을 둘러보니 저 뒤쪽에 한 무리의 젊은 남자들이 두런거리고 있고 그 앞에 동양인 남자가 혼자 있다. 축축해진 압둘의 우산을 접어 크로스백 맨 위에 얹고 일어나 다가갔다. 헬로! 지금까지 사연을 이야기했다.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중국인 청년이었다.


그가 핸드폰으로 찾아보더니 킹스턴에서 출발하는 열차 하나가 취소되어 1시간은 기다려야 하니 버스를 타라고 알려준다. (영국에서 열차 취소는 일상이다.) 213번. 플랫폼 A1에서 타야 한다고 상세히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의 보조배터리로 내 죽은 핸드폰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7%가 되었을 때 내리면서 2 정거장 더 가면 종착역인 킹스턴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첼로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딸에게 전화해 뉴몰던까지 버스로 가겠다고 말했다.


지쳤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배도 고팠다. 휘적이며 킹스턴역을 빠져나왔지만 플랫폼 A1은 보이지 않는다. 사위는 깜깜하고 축축하고 음산했다. A8이라 적힌 곳에 머리가 긴, 미니스커트가 서있다. 이쁘다. 익스큐즈미, 웨얼이즈플랫폼원? 불쌍해 보였던지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더니 대답보다 먼저 손을 올려 길 건너편을 가리킨다. 때마침 213번 빨간 이층 버스가 코너를 돌아가고 있다.


"뤈, 뤈"

미니스커트는 올렸던 오른팔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며 응원을 한다. 나는 방금 바톤을 넘겨받은 계주선수라도 된 듯 달리기 시작했다. A1에 213번이 멈추고 기다리고 있다. 저걸 타야 한다, 생각하는 순간, 오른발 끝에 뭔가 걸린듯하더니, 꽈당!!!


키 170센티의 동양 할매가 사람들이 다니는 대로에 큰 대자로 뻗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직 213번이 기다리고 있다. 얼른 저걸 타고 여길 벗어나자. 아픔보다 부끄러웠다. 일어나서 절뚝이며 기다리라는 신호로 오른팔을 들었다. 손이 닿을듯한 거리에서 버스는 야속하게 출발했다. 손바닥에 버스가 묻힌 것 같은 빨간색이 눈에 들어오고 왼쪽 무릎을 만지니 바지에 구멍이 났다. 안에 입은 두꺼운 히트택 내의는 멀쩡했지만 뭔가 끈끈한 것이 느껴졌다.


벤치에 앉았다. 들고 있던 노트 맨뒤장을 펴서 오른쪽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만년도장처럼 빨간 잉크가 계속 나왔다. 유모차를 끌고 가던 아기 엄마가 물티슈를 꺼내 건네준다. 아유오케이? 아임오케이, 땡큐! 젊은 흑인 아가씨가 말없이 밴드를 건네준다. 땡큐쏘머치!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눈꼬리를 내리며 버스에 올라탔다. 지나가는 이들이 걱정스럽게 물어본다. 앰뷸런스가 필요했다면 바로 불러주었을 것이다. 다행히 뼈는 이상이 없었고 앰뷸런스도 필요 없었다.


다음 버스를 탔고 무사히 딸을 만났다. 넘어졌다고 하니 눈물을 흘리며 잔소리를 해댄다. 왜 뛰고 그러냐고 난리다. 식당주인이 바르는 약과 밴드를 갖다 준다. 역시 모험을 해야 세상이 내게 다가온다. 압둘에게, 넘어지는 바람에 빌려준 우산이 가방에서 빠져나가 잃어버렸다고 했다. 사람 좋은 그는, 우산이 무슨 문제냐 소용없다 너가 괜찮은 것만 중요하다, 고 소리를 높였다. 긴 우산을 하나 사다 주었더니 절대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한다.


긴 하루였다. 팔자에도 없던 킹스턴에서 창피함과 고통스러움을 견뎌내야 했지만 기차에서 도움을 준 낯선 이들과 다친 이방인에게 염려와 위로의 말을 건넨 이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아무 일이 없었다면 아무 존재도 아니었을 그들이다. 슈레딩거의 고양이처럼 사람도 내가 들여다보아야 존재하는 것인가. 넘어졌지만 양자역학을 '제대로' 경험했으니 럭키비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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