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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와 돈 이야기

돈 이야기가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by 오드리

최근에 핫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늙은 관식이 말한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더니, 돈이 전부네, 뭐"


우직하고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아온 관식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숱한 명장면 중 하필 나는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온몸이 부서져라 일만 하던 그가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소문에 넘어가 난생처음 '투자'를 결정하면서 하던 말이다. 집 팔아 딸 유학 보내고, 배 팔아 전과자 될 뻔한 아들 구해내고 겨우 남은 아파트를 담보로 질러버린다. 질러 버린 일이라 '투자'라기보다는 '투기'다. 결국 부동산 사기로 밝혀지고 전 재산을 날릴 위기를 맞지만 우여곡절 끝에 맛집으로 성공은 하게 된다.(드라마니까)


왜 헛웃음이 나왔을까 생각해 보았다. 환갑이 다 되도록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믿고 살아온 삶에 동질감을 느껴서일 것이다. 여전히 돈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돈을 초월한 삶을 산 것도 아니다. 그저 돈에 대해 무지했고 돈에 대한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을 뿐이다.


돈이 전부가 아닌 것, 맞다. 반대로 돈이 전부인 것도, 맞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드라마의 내용을 봐도 그렇다. 애순의 엄마는 해녀일로 돈을 벌기 위해 악을 쓰다 숨병으로 일찍 죽는다. 전체적 흐름은 사랑 이야기지만 대부분이 돈과 관련되어 있다. 애순이 국민학교에서 급장을 뺏긴 것도 돈 때문이고 부모를 여의고 아이가 둘인 남자와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돈 때문이다. 극 중 인물들이 돈 때문에 웃고 웃는다. 사는 것의 기본이 돈이다. (당연한 소린가)


그런데 누구도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관식도 매일 바다로 나가 몸을 써서 돈을 번다. 애순 할머니가 배를 사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덕분에 집도 장만하게 되지만 관식은 왜 학씨처럼 돈을 모으지 못했을까. (그랬으면 드라마가 조기 종영되었겠지) 학씨는 돈을 벌고 굴리는 재주가 있었을 것이고, 반면 관식은 그 재주에 관심이 없었거나 몰랐을 것이다.


드라마에는 돈이 많은 사람은 악인으로 나온다. 학씨도 그렇지만 금명이가 과외하던 집주인도 저속한 졸부로 묘사된다. 돈 밖에 모르는 인정머리 없는 부자들은 드라마의 클리셰다. 착한 부자들은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거나, 축적한 부를 자신을 위해 쓰며 평범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전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없다.


세상 가장 원색적인 제목의 책 '돈'을 쓴 보도 섀퍼의 또 다른 책, '머니 파워'의 첫 장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돈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하여 나는 사람들에게 항상 두 개의 극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중 한쪽 사람들은 돈에 혈안이 되어있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돈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들에게 돈은 삶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중요한 존재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쪽의 극단이 있다. 이들은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처럼 되지 않으려 애쓴다. 이들은 돈 문제에 신경 쓰는 것 자체를 최대한 피하려 한다. 이들에게는 '황금만능주의'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관계, 가족, 건강, 종교 생활, 인간적인 따스함 등을 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돈'이라는 주제를 최대한 무시하려 한다. 고지서 봉투를 열어보지 않은 채 보관하고, 계좌의 입출금 명세서를 '중요하지 않은 서류'로 분류한다. 그리고 돈에 관해서는 가능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리가 이 두 가지 유형이 모두 극단적인 경우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현명하게 중도를 택하는 것이다.'


첫 번째 극단에 속한 사람들은 드라마에 많이 등장한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혹은 권선징악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 그러나 현실에서는 잘 먹고 잘 살기도 한다. 두 번째 극단에 속한 사람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한다. 돈 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돈이 아닌 '무용한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안도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에는 돈을 벌게 되면서 해피엔딩이 되고 시청자들은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허나 현실에서는 삶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을 수 있다.


위의 글을 읽다가 '고지서 봉투를 열어보지 않은 채 보관하고, 계좌의 입출금 명세서를 중요하지 않은 서류로 분류한다'에서 뜨끔했다. 정말 그랬다. '돈이라는 주제를 최대한 무시'했고 '돈에 관해서는 가능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두 번째 극단 중에서도 최극단에 속한 채 살아왔음을 인정한다.


브런치에 돈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돈에 대해 얼마나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얼마나 왜곡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돈 이야기를 꺼내도 조금씩 덜 불편하고 덜 부끄럽다. 이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조금 덜 불편할 뿐 불편함은 남아있다. 오랜 세월 만들어진 단단한 감정의 바위를 뚫고 부수며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가다가 보면 중간 지점 어디쯤에 도달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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