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소중히 여기도록 만드는 의식 행위’
사기사건을 수습하고 나서 제일 먼저 통장에서 새어 나가는 돈의 흐름을, 일단, 막았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했다. 내 재정 상황은 가관이었다. 자세히 밝힐 순 없지만(창피해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방앗간에 쥐와 참새만 배를 불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주인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탈곡 기계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낱알들은 사정없이 흩어진다. 녀석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동이체로 빠져 나아가는 돈을 추적했다. 보험과 회비등을 A4용지에 하나씩 적어보았다. 어떤 돈은 용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해서 은행에 확인을 해봐야 했다. (한심해서 죽는 줄 알았다) 통신비, 신용카드, 관리비, 가스비도 통장 내역을 뒤져서 몇 달치를 정리해 보았다. 표로 만들어 다시 정리를 했다. 통장에 들어오는 돈과 새어 나가는 돈의 흐름이 강물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먼저 감액된 상태로 자동이체가 되고 있던 보험을 정리했다. (속 쓰리지만 미련 없이) 외국 나가 있는 딸아이 실손보험과 국민연금도 중지했다. 현재 필요 없는 것을 계속 넣고 있었다. 성인이 된 본인 없이 자동 이체 중지는 힘들었지만 방법을 찾았다.(뜻이 있으면 길은 반드시 있다) 흩어져 있던 통장도 한 곳으로 몰았다. 파킹통장에 대해 찾아보고 이자가 다소 높은 곳으로 모았다. 방앗간이 깨끗하게 청소가 된 기분이다.
가계부를 쓸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나를 믿었다. (개뿔!) 일단 낭비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허투루 돈을 쓰지 않고 알뜰하다고 믿었다.(헐!)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은 통장을 스치고 사라져 버리니 굳이 힘 빠지게 적을 일도 없다 생각했다. 통장에 다 표시가 되는데 굳이 적을 필요가 없고, 저축하고 잔고가 있으면 된다고 '편안하게' 생각하며 살았다.(에고!)
돈의 흐름을 정리하고 나니 가계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절약만 했지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지듯 돈이 흘러 나가는 것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계부를 하나 샀다. 수첩에 그냥 적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체계적이지 못했고, 나의 상태는 머니 트레이너의 도움이 필요했다. 세상에 가계부의 종류가 그렇게 많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9년 연속 1등 국민 가계부'라고 선전하고 있는 분홍색 표지의 커다란 가계부를 구입했다. 지출의 카테고리를 정해 놓았고 주별로 합산을 해서 월별로 정산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돈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한눈에 보였다.
첫 달은 파악이 되지 않아 절뚝거리며 겨우 마무리를 했고 지출의 총액이 파악된 것만으로 큰 수확이었다. 이것이 왜 수확이냐면, 앞으로 받을 연금으로는 부족한 지출의 규모가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현타‘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두 번째 달은 훨씬 수월했고 신용카드 할부가 마무리되면서 지출이 안정화되었다. 연금으로 겨우 먹고 살 정도였다. 사기사건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현타가 올뻔했다.(역시 럭키비키다)
블로그에서 가계부 쓰기에 대한 글을 읽다가 ’가계부는 당신이 돈을 소중히 여기도록 만드는 의식 행위‘라는 글을 읽고 카피해 두었다. 공감한다. 가계부를 쓴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돈을 소중히 여기도록 생각의 변화를 준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무엇보다 돈을 내 손안에 넣고 컨트롤할 수 있으니 내가 돈의 주인이 되는 첫걸음이다.
주변에 물어보니 가계부를 쓰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물어봤다. 여기서 ‘혹시’란 나 혼자만은 아닐 거라는 기대의 ‘혹시’다. 기대한 대로 역시 많지 않았다. 딱 두 사람을 만났다. 친정아버지와 부동산 부자가 된 고등학교 동창 E다. 아버지는 매일 간단하게 일기를 쓰시면서 가계부도 적으신다. (난 딴 건 아버지를 다 닮았으면서 왜 이건 안 닮았나 알 수 없는 일이다) 고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E는 결혼 후 지금까지 쓴 가계부를 다 모아두었다. 가계부를 쓰면서 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리스펙트!
내 주변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가계부를 쓰지 않고 있지만, 가계부의 종류가 다양하게 많은 것을 보면 실제로 쓰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몇 달 지나니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일기와 함께 가계부를 쓰게 된다. 돈이 어떻게 나가는지 보인다. 돈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이제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참새와 쥐를 다 쫓아낸 방앗간 주인은 이제 뭘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