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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어예 Jan 28. 2024

제 1화 우아한 107동 언니

커밍아웃

인생을 사는 방법은 2가지가 있습니다.

기적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사는 것과

매일 일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기적이라고 믿고 사는 방법입니다.

-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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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언니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새로운 동네로 이사와서 몇년간 말을 튼 이웃이 없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들 둘을 키우느라 혼이 빠져있어 내가 다가가기가 힘들기도 했고, 워낙 카리스마있게 생긴 탓에 내가 먼저 이를 드러내고 웃지 않는 한 나에게 선뜻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들도 좀 커서 학교도 가고, 한 동네 오래 살아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익숙한 상태가 되다보니 말터놓고 지내는 사람들이 몇 생겼는데 말을 트자마자 난 그냥 푼수끼 있는 동네 아줌마가 되었다. 그런데 내 별명이 있었다는 건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뭔데?"

"언니~ 언니말야, 우아한 107동 언니야!"


내가 눈, 코, 입이 큰 편이라 시원시원하게 생기긴 했지만, 얼굴과 덩치 역시 시원하게 큰 편이기 때문에  우아하다는 말은 살다 살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멀리서 보면 왠지 모르게 우아하게 생긴걸까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짐짓 관심없는 척 물어본다.


"엥? 왜???"

"언니~ 맨날 롱치마만 입고 다니쟎아~ 공주 롱치마 같이 샤랄라 한거. 형준이 어릴때, 그 놀이터에 앉아 있을 때도 맨날 롱치마 입고 벤치에 우아하게 앉아서 있고. 그래서 놀이터에 있던 엄마들이 그 우아한 엄마말야 그렇게 불렀어."


그럼 그렇지.

"아 진짜? 왠일이니."

"그러니까~ 언니는 다리도 이쁜데 왜 맨날 롱치마만 입고 다녀?"


우아한 엄마라고 오해 받는 건 정말 양반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오해 받은건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길가다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던 큰아들 친구의 엄마, 즉 같은 학교 학부모에게 얼마 전 장문의 카카오톡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내용인 즉슨 내가 자기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쌩하게 싹 바뀌며 뒤돌아 다다다다 가더라는 거였다. 자기에게 뭔가 기분 나쁜게 있냐는 내용이었다.

물론 난 기억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쪽이 제가 맘에 안드나봐요"

지겹게 들은 얘기다.


선을 나가면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라떼는 말이지 여자는 보통 대중교통을 이용해 나갔다. 보통 남자들이 여자가 마음에 들면 집까지 데려다 주고, 그래도 아주 마음에 없지 않으면 대중 교통을 쉽게 탈 수 있는 곳까지는 데려다주면서 일말의 썸의 여지를 남겨놓는 시간, 그 시간이 자동차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에게 돌아오는 피드백은 늘 같았다.

"영은씨가 제가 맘에 안드나봐요."

(물론 가명이다. 내가 여기서 내 실명을 밝힐 수는 없지않은가? 아 그럼 이글과 앞으로의 글들이 다 실화냐고? 글쎄~ 그건 상상에 맡기겠다.)

물론 선본 상대 남자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핑계를 대느라 또는 여자 체면을 세워주느라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난 정말 그 사람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도 열심히 선에 임했다. 적당히 대꾸도 잘하고, 적당히 잘 웃어주고, 깨작깨작 거리지 않고 복있게 먹고, 적당히 위트있는 농담을 날려주고.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때, 상대방이 나에게 묻는다. 솔직히 뭐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소리는 몇번 못들어 봤고.

"강남역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하.지.만. 난 타지 않는다. 마음에 있다. 정말 타고 가고 싶다. 하지만 탈 수 없다.


뒤돌아 다다다다 뛰어간 것도,

샤랄라한 롱치마도 같은 이유다.





난 손을 모으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나 커밍아웃 해도되?"

"응? 왜 롱치마만 입냐는데 뭔 커밍아웃?"

"언니 뭐 흉터 큰 거 있어? 점 큰거 있어? "


"나 사실은... 과민성대장증후군이야."

"그게 왜? "


그게 왜? 이게 얼마나 괴로운데 그게 왜냐니 나는 흥분해서 다다다다 말이 빨라진다.

"야! 너 설사가 시속 몇키로인지 알아? 70키로야 ~ 시속 70키로... 놀이터에서 갑자기 배가 아파봐봐, 내가 우사인볼트보다 빨리 뛰어야 요 앞 관리실 화장실에 겨우 갈 수 있는데. 만약 만약에 만에 하나 화장실까지 못가면 일단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야해. 그럴때를 대비해서 롱치마를 입는거라고! 너희 같이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 가는 기적같은 삶을 사는 애들이 내맘을 어떻게 알겠어 아주!"

"헐~ 그니까 아무데서나 볼일 볼려고 롱치마 입고 다닌다는 거야?"

"아니, 뭘 또 그렇게 까지. 내가 또 뭐 그렇게 아파트 단지에서 그렇겠니?! 그냥 불안하니까 그렇다는 거지."

"롱치마를 입으면 안 불안하고?"

"일종의 심리적 보호막? 또는 화장실 문 같은 용도랄까?"

"헐~"





"커밍아웃한 기념으로 이제 너희 집 화장실 좀 개방해라. 너희 집 1층이쟎아. 우리집 20층이라 나 너무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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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대장 내시경이나 엑스선검사로 확인되는 특정 질환은 없지만 식사나 가벼운 스트레스 후 복통, 복부 팽만감과 같은 불쾌한 소화기 증상이 반복되며, 설사 혹은 변비 등의 배변장애 증상을 가져오는 만성적인 질환이다.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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