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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어예 Feb 04. 2024

제 2화 묻어둔 과거

아무일도 없었지만

마음깊이 간직한 후회와 부끄러움마저도 결국은 내 삶의 일부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야말로 축복받은 노년을 보낼 수 있다.

- 백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점심 많이 먹지마~! 탄산음료도 먹지 말고! 우유도 먹지 마~! 집에 와서 먹어!"

"알았다고! 그만 얘기해!"

"도시락 통에 백초 넣어 놨어~! 혹시라도 배 아프면 먹고."

"알았다니까~!"

소풍 가는 작은 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것저것 다다다 쏘아낸다.



몇년 전 '버스서 용변 본 6학년 휴게소에 홀로 남겨..아동 학대 혐의'라는 기사가 인터넷을 달궜던 기억이 있다. 모든 일에 감정이입을 잘 하는 편인 나는 이 기사가 너무너무 무서웠다. 상상은 날개를 달고 날아날아 나는 버스 안의 저 아이가 된다. 하지만  내가 저 상황이라면, 뭐 어떻게든 살아갈 것 같다. 이번에는 저 아이가 나의 아이가 된다. 몸서리가 쳐진다. 아이의 당황스러움을, 아픔을 내가 어떻게 해 줘야 할까 아린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조차 없다.



언제부터 배가 예민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문득 문득 흐릿한 영상이 스쳐지나가긴 한다.


발이 지하철 바닥에 닿지 않는 꼬마가 엄마와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중에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엄마한테 말한다.

"엄마 배 아파."

"참아~. 너 안아파"

그럼 지하철이 출발하고 꼬마는 조용히 있는다. 또 문이 열리고 꼬마는 또 엄마 팔을 끌어 당긴다.

"엄마 배 아파아."

" 안아프다니까~ 그건 아픈거 아니야."



중학교 중간고사, 다른 과목들은 다 괜찮다. 꼭 수학 시험날 아침만 배가 아프다. 난 딱히 수학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과목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시험은 다르다. 국어, 영어, 사회 등등 다 시험 시간이 촉박하지 않다. 중간에 화장실을 갔다와도 시간이 충분하다. 하지만 수학은 다르다. 중간에 한번 화장실을 다녀오면 10분은 날라가고, 가뜩이나 촉박한데 10분이 날라가면 2~3문제는 날라간다고 봐야 한다. 수학시험 전엔 늘 화장실 붙박이다.



학생들이 100명도 더 들어차 있는 단과 학원, 요즘으로 치면 스타 강사 현강쯤 될까? 이상하게 강의실의 출입문은 제일 앞에 있었고, 앞자리를 차지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수업이 거의 클라이맥스로 다다를 때쯤 난 배가 아프다. 손을 들어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을 가는 것은 자의식 과잉상태의 사춘기 소녀에게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잠시 고민하다 친구의 빨간 손수건을 빌려 코를 막고 고개를 위로 쳐 들고 이백여개의 눈동자를 끌고 조용히 강의실을 나간다. 잠시후 들어올때는 코피를 닦은 흔적인 듯 코가 새빨갛다. 그 다음부터 빨간 손수건은 필수품이 되었다.



하지만 내 기억 저편에 꽁꽁 묻어놓은 열기 싫은 상자는 6학년때 소풍 다녀오던 버스안에서의 일이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과민성대장증후군을 갖게 된건 다 그때 일때문이야라고 속으로 핑계거리를 삼고 있는 사건. 어디로 갔었는지,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어떤 친구와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 안에서 나는 배가 아팠고, 담임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고, 선생님의 눈빛은 따뜻했고, 다행히 가까운 곳에 휴게소가 있어서 버스는 휴게소로 들어갔고, 나는 무사히 내려서, 뛰어서도 아니고 걸어서 화장실에 여유있게 다녀올 수 있었다. 분명 내 기억에 수치스러웠던 상황도 없었는데 나의 핑계는 그 사건에 멈추어 있다. 왜일까...


여기까지 적고 보니 왜인지가 불현듯, 6학년 이후로 삼십몇년 지난 후 지금까지 왜인지 몰랐던 그 이유가 또렸해진다.


내 속의 작은 아이가 나 여기 있다고 나 좀 보라고 손을 흔든다.

 

그 버스 안에 있었던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 내 안에 웅크리고 있다. 아무일도 없었다고 정말 다행이라고 날 다독여왔지만, 휴게소까지 도착하는 그 버스안에서 나는 너무 두려웠고, 너무 울고 싶었고, 버티지 못해 수치스러운 상황이 생길까봐 너무 무서웠다. 위에 쓴 인터넷을 달군 기사 속의 저 아이가 나라면 어떻게든 살아갔을텐데는 어른이 하는 거짓말이다. 내 속의 어린아이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웅크리고 앉아 무서워하고 있고, 두려워하고 울고 있는데, 겉으로는 어른은 그러면 안되, 아무일도 없었는데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하며 그 아이를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하아....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이 어른을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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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아이

어린 시절의 주관적인 경험을 설명하는 용어로서 한 개인의 인생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다. 뇌 속에 저장된 어린 시기의 기억은 개인의 정서에 관련된 기억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경험적 자원이다.

-상담학 사전, 2016. 01. 15.,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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