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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어예 Feb 11. 2024

제3화 산낙지

더하기 유머한스푼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감정 서랍이 있다.

상황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질지라도, 그때 느낀 감정들은 어딘가에 저장이 된다.

- 김이나


유머를 좋아한다.

유머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뭔가 갑자기 풍선 바람이 쉭 빠지듯 느슨해지며 갓 구운 빵냄새처럼 훈훈한 분위기를 만드는 그런 유머를 좋아한다.

심각할 일도, 사건도 없고 그저 하루 하루 무사히 지나가면 다행이다. 거기에 한번 웃을 일까지 있으면 땡큐지.

 

내 첫 직장은 학교였다. 나는 교사였는데, 과민성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을 때이지만 점심먹고 5교시 수업을 하는 것은 그래도 편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가끔  수업하다가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곤 했으니까.


짧은 교사 생활을 마치고 옮긴 직장은 정말 천국이었다고나 할까?

내 자리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었고(화장실 앞이라고 좋아하는 애), 사무실 밖엔 층층마다 쾌적한 공용 화장실이 있었고, 내 일이 남들과 회의를 많이 하는 일도 아니어서 시간에 구애 받을 일도 없었고. 이보다 더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문제는 입사 2년차 쯤에 생겼다. 수요 임원회의 시간에, 즉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시는 본부장들을 포함하여 사장님과 함께 약 20명의 임원들이 모이는 주간회의 자리에 우리팀 과장님이 들어가 회의록을 작성했는데 그분이 이주간 신혼여행을 가시게 된거다. 누군가가 그 자리를 메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임원은 술냄새를 풍기고 임원회의 들어왔다가 짤리고, 어떤 임원은 사장님의 질문에 대답을 못해서 재떨이로 얻어 맞고, 어떤 임원은 사장님 말씀하시는데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가 짤렸다는 그런 흉흉한 소문이 도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과장님을 대신해서 회의실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제비뽑기를 하자, 사다리를 타자 등등 실없는 소리를 몇번 왔다갔다 한후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나를 쳐다 보았다. 기획팀에 유일한 홍일점. 다들 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가 해라!"

"사장님도 니가 뭐 실수 한다고 저 지점 보내기야 하시겠어?"

"그냥 니가 총대 매."

아악!

결국 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안되요! 저 긴장하면 배 아프단 말이에요! 중간에 배 아프면 어떻게 하냐구요!"


이해를 바란건 아니었다. 역시 돌아오는 반응은 막무가내다.

"손들고 사장님 배가 아파요~ 그래~"

"설마 자르기야 하시겠어? 배가 아프다는데?"

"그냥 싸~ 냄새나면 회의 그만하자고 하시겠지"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이주 동안 회의록은 내가 떠맡게 되었다. 그리고 수요일 전날 화요일. 회의 전날은 늘 야근이다. 회의 자료를 취합해야 하는데 그 자료라는게 늦게 올라오기 때문에 담당자는 늦게 까지 남아있어야 한다. 사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영은씨, 밥 먹으러 가자!"

팀 사람들은 이미 일어나 있다.

"밥은 무슨 밥이에요. 내일 회의 시간에 무사하려면 굶어야죠."

"안 굶어도 되! 내가 아픈데 도움이 되는 좋은 거 쏠께."

"그러지 말고 먹으러가~"

다들 한 마디씩 하는 통에, 그래 아직 자료도 안 왔고 자리 지키고 있으면 뭐하냐 음식점가서 깨작거리고 있자라고 생각하며 따라 간 곳은 바로 산낙지 집이었다.


민감한 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생물은 좋지 않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게되었다. 물론 내 장은 알고 있었다. 육회, 생선회, 심지어 익히지 않은 야채조차 먹으면 배가 아팠지만 맛있는걸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먹고 배아프고 먹고 배아프고를 반복했을 뿐이다. 그런데 회의 전날 산낙지라니, 이건 안된다, 먹을 수 없다.


주저하는 내 앞에서 사수는 두주먹을 과장스레 접었다 폈다 하며 말한다.


"영은아~ 이 산낙지가 말야~이게 빨판도 있고~ 이게 장에 쏙들어가서, 그 너의 장을 이렇게 빨판으로 꼭 잡고 있는거야. 똥도 빨판으로 꽉 잡고 있는거고. 이걸 먹으면 배가 아플수가 없어요~ !"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말이다. 과학적으로 따져 보지 않아도, 붕어빵에 붕어가 들어있다는 말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뭐에 홀린듯 산낙지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팀은 그날 산낙지 몇접시와 소주 몇병을 비우고 돌아왔다.


수요일 아침, 화장실에 들렀다 출근하려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배는 아프지않았다. 사장님이 회의실에 들어서며 어디서 술냄새가 난다고 하셨을 뿐, 회의도 무사히 마쳤다. 팀 사람들은 역시 산낙지의 힘은 위대하다며 웃어댔다. 그 이후로도 사람들은 나를 보며 산낙지 먹자고 깔깔 거렸다.


"산낙지가 꽉 잡아준다니까."


아직도 산낙지만 괜찮다. 살아있는 생물 중에서 먹어도 탈이나지 않는 것은 산낙지가 유일하다. 산낙지의 빨판을 잘근 잘근 씹고 있으면 산낙지가 장을 꽉 잡아줄꺼라는 사수의 목소리와 팀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탱탱한 풍선에 바람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갓구운 빵냄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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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방어기제 중 하나. 어려운 상황 또는 감정적인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유머감각이나 웃을 사용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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