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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Jul 26. 2020

미역국을 빨대로 빨아먹던 그날

남편은 출산의 페이스메이커

임신 막달.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어야 할 아이는 거꾸로 있었다. 산부인과 선생님은 초산이고 막달이라 공간이 좁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수술 날짜를 잡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난 무조건 자연 분만을 하고 싶었는데 수술이라니. 아니 아니 아니 될 일이다!!

물론 의료적 상황이 위급하다면 수술을 해야겠지만 이대로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남편과 나는 폭풍 검색을 통해 아이의 방향을 돌리기에 유용하다는 몇 가지 자세들을 알아냈다.

 

내가 양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지탱하면 남편이 내 두 다리를 들어 의자 위에 올린다. 그리고 남편은 바닥을 보고 있는 내 배를 요리조리 만지면서 돌아가라 돌아가라 주문을 걸었다.

 

효과가 없는 듯했다. 좀 더 강렬한 자극이 아이에게 전해져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은 급기야 내 양쪽 발목을 부여잡고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개구리 뒷다리를 잡고 드는 것처럼 남편은 내 다리를 저 높이 치켜들었고 난 남편의 손에 의지한 채 한 마리의 배부른 개구리가 되었다.


“여보 너무 힘들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애를 낳기도 전에 애가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예정일을 앞두고 매일같이 단칸방에서 열심히 거꾸리 매달리기를 했고 출산 전 산부인과 점검에서 기적과 같은 의사의 말을 듣게 됐다.


어머나 아이가 돌아갔네요. 막달에 거의 안 돌아가는데 다행이다. 아이도 이제 나올 준비를 하나 봐요.”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여자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자기 일인 양 기뻐해 주었다.


남편과 나는 싱글벙글했다.

 

“그때 내가 마사지할 때 확 돌아가는 느낌이 있었다니까. “

그런가? 나는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도대체 언제 돌아간 거지?”


어째됐건 난 감사하게도! 꿈에 그리던 자연분만을 하게 됐다.


아가야 고맙다 고마워! 넌 아주 뱃속에서부터 효자구나!’



예정일은 12월 23일. 의사 선생님은 초산의 경우 예정일보다 늦을 수도 있다고, 해를 넘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뭐 해를 넘겨 태어나면 나이를 한 살 더 안 먹어도 되니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마는, 내심 크리스마스이브나 크리스마스에 태어나면 좋겠다는 로맨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당시 남편은 IELTS라는 영어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도 한 번은 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마음에 오래전 시험을 접수해 둔 상태였다.


내 시험 날짜는 12월 10일 토요일. 예정일보다 2주나 앞이니 큰 무리는 없을 거라 판단했다. 나는 남산만 한 배를 이끌고 서울 강남에 위치한 시험장에 도착했다.

 

나는 수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부푼 배를 내밀며 자리에 착석했다. 배가 너무 불러 책상과 의자 사이 간격이 너무 넓었다. 문제지를 보고 답을 체크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다리를 양 옆으로 쩍 벌리고 최대한 책상 가까이 앉았다. 역시 아줌마가 되면 매사에 용감해진다. 시험이 시작되면 3시간이 넘도록 외부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시험 시작 직전에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임신 막달, 난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보다 ‘3시간 동안 화장실 잘 참을 수 있을까’가 더 걱정스러웠다.

드디어 리스닝부터 시험이 시작됐다. 리딩에 이어 라이팅까지, 나는 간신히 소변을 참아가며 시험을 마무리했다. 다행히 스피킹은 시간 간격을 두고 오후에 진행되는지라 좀 쉴 수 있었다. 아이는 뭘 아는지 모르는지 꿀렁이며 발차기를 해댔고 스피킹까지 마무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어둑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밤,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됐다. 출산 징후가 어떤지 각종 블로그와 맘 카페 글들을 섭렵한 뒤라 나는 그것이 가진통임을 직감했다. 맘 카페에서 추천해준 진통 측정 어플을 깔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 간격을 기록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밤 12시를 지나는 시간, 남편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지금 남편을 깨우기엔 좀 애매할 것 같았다. 진짜 고통이 짧게, 강하게 오면 깨워야겠다 마음먹고 계속 기록을 체크했다.

아프다 안 아프다를 반복하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꼴딱 밤을 새우고 새벽 6시쯤 돼 남편을 깨웠다.


여보, 아기가 나올 것 같아.”

진짜야???. 가자 병원 가자!!!”


병원에 도착해 내진을 받았다. 아직 문이 많이 열리진 았지만 오늘 출산하게 될 것 같으니 입원하자고 했다.


오전 11시경, 내 진통은 더디게 지속되고 있었고 아무것도 못 먹은 남편은 빨리 밥만 먹고 온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왔다가 주사를 놓고 나갔다. 촉진제였는데 난 그것도 몰랐다. 갑자기 고통이 극심해졌다. 너무 아프고 힘든데 혼자 있으니 눈물이 났다. 내가 엉엉 울고 있자 간호사가 나타나 남편을  찾았다.


애기 아빠 어딨어요? 전화해요 전화!”


휴대폰은 손이 닷지 않는 소파에 있었다. 간호사가 갖다 준 폰으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엉엉 엉엉엉”

여보???”

엉엉엉엉어엉

왜 울어!! 지금 갈게!!!!”


그는 김밥을 먹다 말고 눈이 땡그래져서 달려왔다. 나는 사경을 헤매고 울고 있었다.


“엉엉 엉엉엉 아파 엉엉 엉엉”


남편이 손을 잡아주니 좀 진정이 됐지만 가슴속 깊이 김밥옆구리 터질 때까지 때리고 싶은 마음이 물밀듯 밀려왔다. 간호사가 자꾸 울면 아이에게도 안 좋다고, 제대로 호흡을 해야 아이도 나올 준비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나 때문에 아이가 힘들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난 소리를 지르는 대신 어금니를 깨물었다.


진통이 오면 남편 손을 한번 두드리는 걸로 합의했다. 그러면 남편이 손을 더욱 세게 꽉 잡아주고 흡 후 흡 후 하면서 옆에서 같이 호흡해줬다.


(손 탁)

“흡 후 흡 후 오올치 잘한다 흡 후 흡 후”


(손 탁)

“흡 후 흡 후 그렇지 그렇지 잘하고 있어 여보!!”


2인 1조의 출산 호흡은 계속됐다. 옆에서 똑같이 호흡만 해줘도 큰 힘이 났다. 마라톤을 뛸 때 옆에서 같이 뛰며 페이스를 조절해주는 페이스메이커처럼, 남편은 장시간 이어지는 출산의 고통을 함께 해주는 출산 버전의 페이스메이커였다.


오후 한 시가 넘어가자 드디어 무통 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무통이 천국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잠시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면 나는 곧 잠에 빠졌다. 밤새 가진통에 시달리니 내 몸은 밥도, 물도 아닌 잠을 필요로 했다. 아픔이 찾아오고 잠이 찾아오고를 반복하던 그때, 내가 다시 남편 손을 다급히 쳤다.


(탁탁탁)

“왜 그래???? 아파??””

의.. 사..”


갑자기 진통이 심해졌다. 담당 선생님이 급히 올라오셨다. 아이가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뱃속 아이는 2.7킬로로 크지 않았는데 신랑을 닮았는지 머리둘레 또한 작았다. 나는 잘 낳겠다는 의지로 최대한 의사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강하게 힘을 줬다.


오후 3시 33분, 건강한 아이가 세상으로 나왔다. 아이는 힘차게 울었고 간호사와 남편을 행해 오줌을 시원하게 발사하며 자신의 탄생을 자축했다.


아이가 내 곁에 누웠다. 눈물이 났다. 엉엉 울었다. 남편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가 됐다.



하지만 계속 피가 멈추지 않았다. 하혈을 일반 산모보다 세 배 가량 많이 했다고 했다. 상황이 마무리되고 일반실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기절하고 말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니 갑자기 일어나면서 쇼크가 온 것이다. 휠체어에 실려 이동했고 다시 누웠다. 내가 힘을 과도하게 많이 준 탓에 요도관까지 찢어져 있었다.


그 사이 부랴부랴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엄마가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엄마를 보니 그냥 눈물이 났다.

식사가 나왔다. 미역국이다. 난 내가 저걸 잘 먹어야 아이 줄 모유가 나온다는 생각에 퍼뜩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나니 다시 어지러웠다. 상체를 세울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계셨다.


“우짜꼬”

“엄마, 빨대”

“응?”

“빨대 좀 구해와 봐.”


엄청난 모성애를 바탕으로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빨대였다. 엄마는 바로 크고 굵은 빨대 하나를 구해왔다.

나는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등반가가 깃발을 꽂듯 미역국에 빨대를 꽂았다.

빨대를 쪽쪽 빨아 마시니 미역국 국물이 몸으로 들어왔다.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누워서 미역국 국물을 다 마시고 수유를 하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피가 부족해 수혈을 두 팩이나 받아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밑에서 피가 뚝 뚝 떨어지는데 링거를 꽂은 채 수유를 하겠다고 병실 밖을 나섰다. 당시 나는 내가 하혈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내 상태를 잘 모르는 신생아실에서 수유 콜을 해오자, 아이가 배가 고플 것이라는 생각에 몸을 일으킨 것이다.

담당 간호사가 손사래를 치며 달려왔다.


“엄마,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한테도 모유를 주는 거예요. 지금 엄마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까 계속 누워있어야 해요.”


결국 나는 남들보다 이틀 더 입원해 몸을 회복했고 이후 병실을 퇴원해 본격적인 수유 전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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