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노전정리

정리할 힘 있을 때 하나씩 정리해보자

by 퇴사자

나는 서울 강북 지역 노후한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다. 몇 년 전 누수로 아래 4개 층에 걸쳐 피해를 드리게 되어 사과, 보상, 수리 등으로 여러 차례 방문하게 되었다.


누수가 발생한 곳은 부엌 천장 부분이었는데 도배를 해드리기 위해 현관부터 거실을 거쳐 부엌까지 동선을 지나가야 했다. 4개 집 중 한 집만 빼고 그 동선에 양쪽으로 짐을 수북히 쌓아놓았다. 한 사람이 조심스레 지나가도 겨울이라 외투 때문에 냄비 같은 집기를 양쪽으로 쌓아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게 해놓아 살짝만 건드려도 물건이 미끄러져 우당탕 소리내며 떨어져 놀랐다.


상당한 연식의 아파트이고 30년 이상 한군데에서 산 노인분들이 많은 아파트라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한 집은 노년 부부셨는데 나머지 두 집은 노인이 아닌데도 역시 집 안에 짐이 빽빽히 차 있었다.


노전(老前) 정리는 심각한 질병이 있거나 노년이 찾아오기 전에 중장년에 미리 삶의 전반을 재점검하고 정리해서 인생의 후반전에 의미 있는 곳에 집중하도록 하자는 의미로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미니멀리즘에 꽤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중에 나온 미니멀리즘 관련 책은 모두 찾아 읽을 정도로 한때 빠져있었다. 매일 미니멀리스트 카페를 들락거리며 뭘 정리할지 미니멀 선배들의 경험에서 배우곤 했는데 이제는 더이상 딱히 나에게 새로운 정보가 없어 그 카페는 탈퇴한 상태이다.


부모님 집에 방문할 때마다 냉장고 문을 열면 떨어져 무기가 될 수도 있는 냉동실의 까만 봉지 속 음식들을 정리하고 투명한 비닐에 넣고 크게 이름표를 붙인다. 그리고 냉장고 문에도 냉동실과 냉장실 각각 현재 들어 있는 음식의 리스트를 써붙여, 냉장고 문을 열지 않고도 보유하고 있는 음식을 알수 있게 하고 소모하고 나면 줄을 그어 소진했음을 표시한다.


솔직히 이런 나의 노력이 얼마나 유지될까 의구심이 있었지만 그래도 몇달 이상 정리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부모님이 애쓰시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부모님 집에 소쿠리 열개 넘게 있길래 쓰는거 하나만 놔두고 버리자는데 완강히 거부하신다. 전기밥솥도 3개나 있는데 젤 좋은거 하나만 두고 버리자해도 거부. 언제 필요할지 모른다며 불안해서 버릴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실제로 많이 처분해본 나는 버린 후 생각난 적이 거의 없다. 있는 물건도 기억을 못하는데 버린 물건을 기억할 만큼 머리가 좋은 사람은 흔치 않다.


나는 한때 좋은 손톱깎이를 찾기 위해 일본 여행할 때마다 하나씩 사보았다. 손톱깎이가 여러개 있다면 그 중에 제일 좋은 것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정리하면 된다. 그렇게 방 하나씩 서랍 하나씩 구역 하나씩 정리해 나가면 된다.


한국처럼 집세와 땅값이 비싼 나라에서 나도 한때는 배송료 아끼려고 주문하는 김에 대용량 주문을 하곤 했다. 두루마리 휴지를 잔뜩 쌓아놓고 비싼 집세 비용에 세금까지 내고 사는 것은 어리석다. 저렴한 생활용품이나 대용량으로 쇼핑한 짐에게 집의 공간을 다 내어주고 사람이 정작 공간의 주인이 되지 못한채 조심해서 겨우 지나다녀야 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정릉 집.jpg 부동산에서 와서 보면 짐 없다고 놀라던 집

짐이 없으면 일단 먼지가 물건 위에 쌓일 수가 없고 청소가 쉬워진다. 특히 로봇청소기 사용 시 장애물이 없어지니 내 몸이 편하다. 짐이 더 줄면 로봇청소기 먼지 빼기도 귀찮아서 밀대로 몇번 왔다갔다 밀면 더 편하다.


짐이 줄면 쾌적함 뿐 아니라 가사 노동이 줄어 내 몸이 전보다 편해져서 삶의 질이 올라간다.

오래된 옷을 줄이고 현재 진짜 잘 입는 옷만 남기면 세탁소 비용 같은 의복 관리 비용도 줄고 무엇보다 외출 전 옷 고르는 시간이 혁신적으로 줄어든다.


옷 정리의 일번 원칙은 보풀 생겼거나 얼룩 있거나 입었을 때 나를 초라하게 보이게 하는 옷만 정리해도 이미 반은 성공이다. 아무리 비싸도 나를 빛나게 하는 옷이 아니면 버리거나 기부하면 됩니다. 버리고 나면 기억도 안나고 버리는 과정의 고통 속에서 다시는 과소비를 하지 않고 작은 것 하나를 살 때도 신중해진 나를 발견한다.


쇼핑하는 낙으로 사는 부모님은 70대에도 신상 나올 때마다 쇼핑을 하는데 제발 10년 넘은 옷은 버리라고 해도 못버리시고 옷장에 옷이 서로 찌부되어 새옷도 마치 헌옷처럼 눌러져 있다. 가방은 그나마 당근 앱에서 중고로 팔아서 적은 액수라도 드리니 처분하시는데 옷 기부는 거부하셔서 정리를 못하고 계속 구겨져 있다.


남이 사용 가능한 깨끗한 옷과 살림살이는 굿윌스토어, 아름다운 가게 , 옷캔 등에 예약하면 3박스인가 어느 정도 분량 이상이면 미리 예약해둔 날짜에 배송 비용 없이 수거해간다.


가족들을 위한 배려


본인이 죽기 전에 본인 짐을 정리해놓고 가는 사람은 몇 퍼센트 정도 될지 궁금하다. 누군가 사망하면 으레 유족이 정리하곤 한다.

나는 내가 죽으면 남들이 정리하면서 욕할 거, 빵꾸난 속옷, 얼룩진 옷부터 버렸다. 비싸고 멀쩡한 옷이라 한들 유족이 정리하기 편한 옷은 없다.


멀쩡한데 나한테 안 어울리는 옷은 내가 지불한 가격을 생각하면 처분이 힘들지만 기부해서 누군가가 가치있게 잘 쓴다고 생각하니 환경 오염도 막고, 마치 내가 좋은 일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 좋게 보냈다.


보낼까 말까 고민하던 비싼 옷도 보내고 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사놓고도 내 옷이 뭐 있는지 모르는 살았던 것처럼.


이제 샘플이나 사은품도 절대 받지 않는다. 몇년 동안 서랍 속만 차지하고 결국 먼지구덩이째 버리게 되는 경험을 반복했다.


쇼핑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만 사고, 생필품도 미리 사놓기 보다 다 소모한 후에 주문해도 다음날 도착하니 물건 더이상 집에 쟁일 필요가 없어졌다.


짐을 정리하려면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해서 노인의 힘으로 하기에 어려움이 큰 것도 중장년에 노전정리를 해야 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유품 정리에 드는 돈도 수백만원이 드는 경우가 많아 이것 역시 현실적인 이유다.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것은 젊은이에게도 무척 어려운 결정이다. 강한 판단력이 있을 때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길 강력하게 권한다.

한국 그림.jpg 김기창 정청(靜聽) 1934. 내가 생각하는 단정한 집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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