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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미 Nov 30. 2020

꼭 다시 오고싶은 서점

책방 '소리소문'에 다녀오다

제주 한달살기가 끝나간다. 엄마가 아이 봐줄테니 남은 3일은 내가 원하는 것 하면서 자유시간으로 쓰라고 하셨다. 평소에도 가사일에 힘드셨을 텐데, 제주까지 와서도 손주 돌보느라 밥 하느라 고생한 우리 엄마. 본인도 진정 자유시간이 필요했을 터인데 그마저도 딸에게 양보해 주시다니. 감사하고 죄송했다. 난 나중에 자식에게 이렇게 넉넉한 마음을 가진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못이기는 척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남은 3일을 오롯이 나를 위해 보내보기로 했다.  


첫날은, 숙소에서 조금 먼 곳으로 다녀오고 싶었다. 그동안 아이의 스케줄에 맞추다 보니 차로 오래 이동해야 하는 곳은 가질 못했다. 난 괜찮은 것 같은데 엄마는 자꾸만 아이가 차를 오랫동안 타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이번 여행에서 엄마는 철저히 아이 위주였고, 나는 아이보다는 내가 우선일 때가 많았다. 그것이 엄마와 종종 트러블이 생긴 원인이었다. 어쨌든 남은 3일만큼은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다시 가 보고 싶었던 산굼부리, 그리고 사려니숲길과 휴애리 공원에 가 보았다. 5년 전에 학교 수학여행으로 찾았던,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던 5월의 산굼부리는 나에게 너무나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아 있었는데, 그때와 같은 장소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비가 오고 날이 흐린 탓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곳이라도 누구와 왔었는지, 나의 마음 상태가 어땠는지, 언제 왔는지에 따라 다르게 저장되고 기억되는 것 같다. 어떤 배경으로 아무렇게나 찍어도 '와' 함성이 나왔던 우리 반 아이들의 사진이 머릿속에 슥슥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이 갑자기 보고싶었다. 


둘째날인 오늘은 왠지 서점에 가고 싶었다. 제주에 와서 며칠 안 되었을 때, 애월 숙소 근처에 '주제넘은 서점'이라는 책방이 있는 걸 우연히 발견하고서 반가웠는데 한번 가봐야지 하고 계속 미루고만 있다가 오늘에야 찾게 되었다. 평일 오전에만 연다는 이 독특한 서점에 꼭 가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며칠 간 '주제넘은이의 사색기간'이라 휴업한다고 적혀 있었다. 왜 오전 4시간만 여는 건지, 시골에 있는 이 서점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기억하고 싶어서 책방 전경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언젠가 기회가 꼭 닿기를.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한림읍으로 차를 몰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책방 소리소문'에 가기 위해서다. 아이고, 10시에 도착했는데 오픈 시간이 11시였다. 한 시간동안 주변을 배회하고 11시에 맞춰 다시 책방 문을 열었다. 책방에 머무는 내내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은 '아, 내 취향저격이네 여기.'였다. 책방마다 풍기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동안 가 보았던 책방들 중에 단연 최고였다. 관심가는 책들이 많았던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다. 정말 사고 싶었던 책이 족히 열 권은 넘었으니. (집어들었다 내려놓다를 반복하다 결국 두 권을 사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책방 주인의 섬세함과 고민이 곳곳에 묻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일을 하든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 좋다. '무엇을' 하는가보다는 '어떻게' 그 일을 해 나가는가가 중요하다. '책방 주인=책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의 단순한 공식이 아니라, 그가 책을 파는 일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책방이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펼쳐나가는지가 핵심이다. 그래야 본인도 지치지 않고 오래 그 일을 할 수 있고, 그런 수고가 있어야만 그 진심이 고객에게도 가 닿게 되어 책방을 자꾸 찾게 만들 것이다. 난 주인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한 시간동안 천천히 둘러본 책방의 여기저기에서 그의 생각과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한쪽 벽에는 '책방을 위해 노력하는 주인의 수고가 보인다면, 책 한 권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그냥 사진만 찍고 나가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관광지 탐방하듯 사진만 찍고 시끄럽게 놀다가 후다닥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꽤 많은 듯했다. 책방이 그저 관광코스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걱정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이 책을 보기 위해 책방에 오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는 생각도 들었다. '블라인드 북' 코너도 마음에 들었다. 상자에 싸서 책 표지가 보이지 않도록 한 후에, 책방 주인이 적어놓은 몇 가지 힌트만 보고 자신이 원하는 책을 선택하는 식이다. 내 돈 주고 내가 사는 것이지만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는 느낌이 아닐까. 가장 좋았던 것은 책 옆에 그 책에 대한 책방 주인의 간단한 설명이 있는 것이었다. 누구에게 적합한 책인지, 어떤 사람이 읽으면 도움이 되는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이것은 김소영 전 아나운서의 '당인리 책발전소'에 갔을 때도 본 적이 있는데 책방 주인이 나를 좀 더 친절히 안내해 준다는 느낌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난민을 위한 프로젝트 코너(암란의 버스)를 마련한 것도 새로웠다. 관련 동영상이 흘러나오고, 난민의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 '암란의 버스/야스민의 나라'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림책이 얼마나 팔릴지는 모르겠으나 이로 인해 고객 중 누군가는 난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질문을 갖게 되고 무언가를 행동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게 책방의 힘이 아닐까. 


나를 위한 책 한 권, 남편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한 권을 사고서 책방을 나왔다. 진정 책방을 응원하는 일은 자주 책방에 발을 들이고 책을 많이 사는 것일 텐데, 주머니 사정상 두 권밖에 못 사 아쉽다. 주간지 시사iN에는 이런 광고가 있다.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셨군요. 동네서점에 영혼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책방으로 인해 내 영혼도 역시 충만해진 느낌이다. 책방이 부디 오래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나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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