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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미 Nov 23. 2020

여행 19일 차, 그냥 돌아갈까?

이러려고 떠나온 건 아닌데

어느덧 여행의 2/3가 지났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시간은 정말 빠르다. 낯설던 제주 생활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렌터카 운전도 편해졌고, 숙소 근처의 동네도 이제 친근하게 느껴진다. 자주 들르는 가까운 장소는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지 않고 운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 이 곳을 왔을 때에 느낀 설렘과 긴장은 여행 3주가 지난 지금, '편안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요즘 매일 느끼는 나의 변화는 부쩍 짜증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엄마의 말이나 행동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결혼 전 부모님과 7년 정도 같이 생활할 때는 이렇다 할 갈등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나서 일주일 정도는 친정에 가서 지낸 적 있어도, 이렇게 한 달 동안 엄마와 같이 지내는 것은 처음인데 제주에서 머문 지 열흘 정도 지나자 사사건건 부딪쳤다. 엄마가 아침 일찍 산책 나갈 때 준비하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아이가 깨는 것도 화가 났다. 아이가 워낙 예민해서 작은 소리에도 깨는 것인데, 나도 덩달아 일찍 일어나야 하니 고역이었다. 오늘은 어디에 갈지, 점심은 무엇을 먹을지 모든 일정을 스스로 짜는 것도 슬슬 지쳤다. 엄마는 평소 걱정이 많은 편인데 제주도에 와서도 매일 엄마의 걱정들이 추가되었다. 코로나 시국이니 식당 내에서 식사하는 것은 안된다, 날이 어두워져 운전이 위험하니 저녁에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안된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오늘은 그냥 숙소에서 지내는 것이 좋겠다.. 등등 온갖 '안 되는' 것들의 집합이었다. 일단 부딪쳐보고 나서 생각하는 나와는 정반대의 태도에 나의 스트레스 지수는 치솟았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아이의 컨디션에 모든 스케줄을 맞춰야 하니, 오래 걸어야 하는 오름이나 숲에는 가지 못하는 것도 속상했다.


며칠간 시끄러웠던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하며 나는 깨달았다. 아이와 친정엄마와 함께하는 이 여행에서, 나는 나 홀로 여행에서 느꼈던 기쁨을 기대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기에 바빴던 20대 시절,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가고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어 여행 자체가 자유와 힐링이었다. 아이 엄마가 된 30대 중반인 지금, 달라진 상황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 홀로 여행을 하며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만끽했던 그때의 즐거움을 이곳에서도 찾고 있는 것이었다. 곶자왈 환상숲 대신 에코랜드를, 비자림 대신 동물 먹이주기 체험이 가득한 동물원을 여행 코스로 삼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든 것이 불만이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리라.


생각해보면 나는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즐기는 것을 참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 학교에 4년 있으면서 매너리즘에 빠질 즈음, 작은 학교에 가서 시골학교의 낭만을 느끼며 몇 안 되는 아이들과 가족처럼 끈끈하게, 즐겁게 지내보겠다는 포부가  녹듯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은 학교에서의 새로움이 익숙함으로 바뀔 때쯤, 나는 또다시 그곳 생활의 불만을 한가득 뿜어내기 시작했으니. 작은 학교에서의 근무는 흔치 않은 경험일 테니 그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었겠으나 애석하게도 많은 시간을 짜증과 불평으로 흘려보냈다. 그곳을 떠나고 나서야 나는 그때의 소중함을 느꼈다.


누가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엊그제는 새별오름을, 오늘은 한담 해변을 홀로 다녀왔다. 여유 있는 두 시간을 보내며 며칠간의 내 모습을 자책하기보다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차린 것에 대하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이 변하면 그에 맞게 옷차림이 바뀌는 것처럼, 환경이 바뀌면 그에 걸맞게 나의 행동과 생각도 조정되어야 한다. 나는 엄마와 아이와 이곳 제주도에 왔다. 그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함께하고, 누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면 된다. 나 홀로 여행에서의 자유는 나중에 여기에 혼자 여행을 와서 느끼면 될 터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도 분명히 제주는 두 팔 벌려 나를 반겨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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