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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자 May 28. 2020

"선생님 저 또 왔습니다."

말기암 환자 이야기

2015년 12월 1일, 절기상 대설을 일주일여 앞두고 40대의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토혈로 응급실에 입원했다.


남루한 행색에 어두운 피부색이 기억에 남는다.


3개월 전부터 토혈과 혈변이 있었고 일주일 전부터는 횟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주민등록말소로 건강보험 자격이 없었으며 보호자(가족)를 묻는 말에는 입을 닫아 버린다.

가정사를 알 수 없으나 홀로 일용근로를 하며 고시원에서 생활해왔다.


환자는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퇴원을 요구했으나 의사는 적극적으로 입원을 권유하며 사회복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알코올성 간 경변이지만 토혈, 혈변, 척추증, 호흡곤란 등 다양한 증상과 진단이 내려진다.


알코올 의존 환자의 경우 입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협조적이지 않은 경우를 많이 봐 왔던 터라 작게나마 편견을 가지고 환자와 상담을 했다.


사업실패 후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들과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지금은 신용불량에 가족들과의 관계도 단절되어 있다.


가족들과의 관계, 사회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음주를 시작하게 되었고 만성화되어 의존에 이르게 되었다.


중독단계에서는 스스로 의지로 알코올 의존을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2017년 4월부터 국민기초생활 수급자로 보호받게 되어 그나마 숨통이 트였지만, 병원 이용이 잦아 생활이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여러 차례 입원 치료를 받으며 때로는 비협조적이기도 때로는 치료를 거부하고 탈원을 하기도 했다.


가족이 없어 무료하게 입원 생활을 해야 했던 환자는 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진료를 받을 때마다 설득해야 했다.

지금은 외래 진료를 받을 때나 입원을 하기 전 꼭 사회복지팀을 들러 안부를 물어본다.


"선생님 저 또 왔습니다."라는 말이 "너무 지쳤습니다. 앞으로는 병원에 오기 싫습니다."라는 말로 들린다.


2020년 1월, 간암(간세포암종) 진단을 받게 된다.


"나을 수 있습니까?, 완치될 수 있습니까?"를 물어보지 않았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를 물었다.

환자의 얼굴에 후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리라 생각된다.


얼마를 더 산다고 한들 환자의 상황이 더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생전에 정리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꾸준히 치료 잘 받으라는 말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출처 : Pixabay로부터 입수된 Gerd Altmann님의 이미지 입니다.>


기분 탓인지 암의 진행이 빠른 것 같다.


척추 전이, 뇌 전이가 의심된다.

다행히 척추 전이는 없었으나 뇌 전이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보호자가 없는 환자는 직접 마주해야 했다.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던 환자는 극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우울감이 빠졌다.


2020년 4월, 증상의 악화로 사망 가능성이 높아 의사가 다시 사회복지팀에 보호자 확인을 의뢰했다.


주민센터를 통해서는 확인할 수 있는 보호자가 없었고 환자 또한 가족들은 다 소용없다고 한다. 연락이 끊어 진지도 수십 년이 되었다.


2020년 5월 28일, 병원에서 마지막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퇴원하시면 요양병원에서 생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치료받으셨는데 후회는 없으신가요?"


"그래도 이만큼 살았잖아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이만큼도 못 살았습니다."

"말기 암이라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환자의 눈시울이 붉어질 뿐 표정으로는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환자는 요양병원으로 입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지겹도록 입퇴원을 반복하며 병원 생활에 진절머리냈을 것이다.

요양병원으로 꼭 가셔야 한다고 더는 권하지 못하겠다.


"퇴원하고 집으로 가서 있겠습니다. 더 나빠지면 요양병원으로 가지요."

"집주인에게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퇴원해서도 자주 연락하겠습니다."


5년 동안 한 달이 멀다 하고 얼굴을 마주했던 환자다.


퇴원하게 되면 더는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갑작스럽게 연락이 오지 않게 될 날을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무거워진다.


환자와 함께 침상에 걸터앉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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