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른환경 02화

눈칫밥 어린이.

by 김커피

겨우 일곱 살부터 굉장히 눈치가 빨랐다. 어린 나이라 시야가 넓진 못해도 내 앞에 있는 어른들의 말이나 나를 보는 눈빛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맡겨진 나는 어릴 적에 무슨 이유에선지 전학을 몇 번씩 다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댁에 있다가도 갑자기 이모댁으로 맡겨지기도 했는데 나중에 머리가 좀 크고 나서야 엄마와 아빠의 이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모댁에 맡겨진 나는 식당을 하고 계시던 이모댁 근처 학교의 병설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매트 위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던 너른 마룻바닥의 옛날 유치원.

하루는 이모의 늦잠으로 등원 시간이 조금 지나서 유치원 문 앞에 다다랐다. 늦었다며 얼른 뛰어가라는 이모의 목소리에 유치원복을 제대로 입지도 못한 꼴을 하고 서있는 문 앞의 유리를 통해서 나를 보는데 너무 창피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친구들과 선생님이 다 쳐다볼 텐데.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날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단결석을 했다.


지금처럼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던 세상이 아니었다. 아는 것도 아는 곳도 없지만 시간은 때워야 했기에 이모가 운영하는 식당 옆 오락실에 들어가서 오락기 화면만 멍하니 보다가 벽에 걸린 시계 보기를 반복했다. 내 인생에서 시간이 느리게 가던 유일한 날이었다.


벽시계가 하원 시간쯤을 가리키자마자 나는 식당으로 뛰어가서 "다녀왔습니다!"

다녀온 척하는 주제에 발랄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주방에 서있던 이모의 눈빛이 무서웠다.

"다녀오긴 뭘 다녀와.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이모는 유치원 선생님께 내가 등원하지 않았다고 무슨 일이 있냐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잔뜩 주눅 들어서 말없이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열려있는 문 사이로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와 통화 중인 것 같았는데 내가 들은 말의 전부는

"저는 도저히 얘 못 데리고 있겠어요 아버지! 데리고 가세요!" 이거였다.


그날 밤 잠들지 못하던 나는 혼자 생각했다.

생판 남인 유치원 선생님도 등원하지 않은 나를 걱정해서 전화했는데. 그런데 이모는 왜 내가 유치원에 들어가질 못했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화를 내는 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난 내가 뭘 하든 눈치를 주는 이모 때문에 밥도 반찬도 많이 안 먹고 심부름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진짜였다.

를 그리 신경 쓰지도 않던 이모는 학습지도 당신의 아들만 등록해서 시켜줬다. 나와 같은 년도에 태어났지만 1월에 태어나 오빠가 된 나의 사촌. 나는 그게 부러웠다. 그래서 항상 공부하기 싫다고 문제 풀기를 미루던 오빠 대신에 내가 몰래 학습지를 풀었다. 그러면 그 칭찬은 사촌오빠가 받았다. 사실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는 오빠가 얄밉기도 했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문제만 풀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며 만족했다. 이모와 이모부 마음에 들기 위해 재롱도 많이 부렸다.

하지만 유치원 한번 안 갔다고 할아버지께 나를 매일 말썽 피우는 아이인 것처럼 말했다. 그간의 눈칫밥은 허사였다. 애초에 이모는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조금 크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가 마음 아파하고 미안해할까 봐 한 번도 이모에 대해, 그 집에서 지내는 동안의 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 이모와 엄마, 성인이 된 사촌오빠와 내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때 이모는 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어릴 때 예쁨 받으려고 얼마나 용을 쓰던지. 맨날 노래해 보겠다고 하면서 칠갑산을 그렇게 잘 부르더니만."


일곱 살 아이가 칠갑산이라니.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다는 그 칠갑산을 일곱 살짜리가 맡겨진 곳의 친척어른에게 예쁨 받으려고 용을 쓰며 불렀다니. 그걸 회상하며 그저 웃긴 이야기라도 하듯이 말하다니. 아무렇지 않게 웃어대는 이모를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어린 날의 내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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