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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Dec 08. 2021

월스트리트, 흥행에 실패하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 07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이후 금융계는 바쁘게 움직였다.


폭락하는 주가 지수와 마진 콜


일시적인 기술적 하락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쏟아진 증거금 입금 요청(일명 마진 콜)에 의해 엄청나게 폭락한 주식을 팔 수밖에 없었다.


흘러넘치는 주식은 다시 가격 하락을 가져왔고 또 다른 마진 콜(margin call)을 불러왔다.



주가 하락 모습 (1929년 ~ 1932년)  <출처 : 위키피디아>



월가의 주요 은행가들은 J. P. 모건 사에서 모여 대책을 논의했으나 뚜렷한 해결방안은 없었다.


1907년 위기를 극복한 모건은 이미 오래전에 죽고 없었고 금융의 주도권을 쥐고 균형점을 유지하던 뉴욕 연준 의장이었던 벤저민 스트롱(Benjamin Strong, Jr.)마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리처드 휘트니의 쇼맨 쉽


이들은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2천만 달러를 모은 뒤 당시 증권거래소 위원장인 리처드 휘트니(Richard Whitney)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휘트니는 이 돈을 가지고 호기롭게 객장에 나타나 누구나 보란 듯한 쇼맨십을 연출했다. 가격이 폭락한 US스틸 주식을 넉넉하고 여유롭게 매입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일단 결과는 좋았다. 시장의 환호성에 잠깐 주가가 올라 '이제 회복하나' 싶은 심리가 가득했다.



증권거래소 위원장 리처드 휘트니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유명 투기꾼들 몇몇이 자살했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오더니 주가가 다시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10월 29일 검은 화요일


10월 29일,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이라 불린 이날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주식시장 개장을 알리자마자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매도 주식으로 주식시세 표시기가 바로 멈춰 섰다.


참고로 이날 거래된 주식 수는 약 1,600만 주였다. 평균 거래되는 주식 수가 약 800~900만 주 내외임을 감안할 때, 이날의 매도 수량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1929년 뉴욕 증권거래소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누군가 팔려고 하면 사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법.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이 쉽게 매수에 나서지 않았고, 매분, 매시간 계속 가격은 하락했다.


결국 장이 끝나고 난 뒤 4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감을 할 수 있었다.


이날 다우존스 지수는 지난주 대비 약 23퍼센트, 9월 대비 40퍼센트 폭락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극심한 심리적 공황이 최고조에 달한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을 시작으로 엄청난 경제 불황이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월스트리트 흥행에 실패하다'


'검은 화요일' 사건을 두고 할리우드 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기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신문인 '버라이어티(Variety)'사는 '월스트리트 흥행에 실패하다(Wall Street Lays An Egg)'라는 타이틀을 만들어 배포했다.



월스트리트 흥행에 실패하다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문구는 언론 역사상 비극을 희극으로 표현한 가장 성공한 헤드라인 사례로 뽑혔다.


대폭락의 기운으로 암울한 하루를 보내고 난 뒤, 다음 날 소문을 듣고 저가에 매수하려는 이들이 몰려들면서 일시적으로 주가는 반등했다.


이 중에는 거부인 존 록펠러를 비롯하여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Joseph Patrick "Joe" Kennedy, Sr.)도 있었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이미 늦었다.


11월 들어 다시 하락세가 이어졌고 11월 중순에 가서야 가까스로 멈춰 섰다. 결국 1927년부터 이어온 상승세를 모두 반납하게 되었다.



조지프 케네디 <출처 : 위키피디아>



정치권은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후버 대통령의 뒤늦은 경제 회복 정책


후버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런 분위기를 타고 12월에 일시적인 반등이 있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뛰어난 실적이 뒷받침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한 몫했다. 주로 항공산업과 철강, 소비재를 파는 백화점의 실적이 우수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아울러 언론도 이를 부채질했는데, 과도한 주가 상승으로 발생된 조정 일 뿐, 기업의 실적은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1925년 미국의 항공 노선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 주가 폭락으로 주식 투자자 중 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된 사람은 알려진 사실과 많이 다르다.


실제로 투자에 나서 주식을 보유한 개인은 전체 인구의 약 2.5% 였다. 과도한 증거금 요구에 의해 강제 처분된 이도 많았으나 굳세게 팔지 않고 주식을 보유한 이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다가오는 불길한 그림자


아직 본격적인 불황이 닥치기 전이었고 은행이 파산한 숫자도 전년에 비해 많지 않았다(1929년에 약 660개의 은행이 파산했다).


후버 대통령도 적극적으로 경제 살리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이제 암울했던 1929년이 저물어 가고 1930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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