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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Dec 10. 2021

1930년 '스무트 홀리 관세법'과 경제 침체

1929년 미국의 대공황 08


1930년에 들어섰다.


사실상 연준을 주도하고 있던 것은 뉴욕 연방준비은행이었다. 1929년 10월 갑작스러운 주식 시장 위축을 본 이들은 바로 금리는 낮추었고 지속적으로 이 정책을 유지했다.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하



뉴욕 연방준비은행  <출처 : 위키피디아>



3.5퍼센트까지 떨어진 이자율은 어느 정도 숨통을 틔워주었고, 추가적으로 연방정부 채권을 매입하면서 시중에 달러를 공급했다.


당시 은행장인 해리슨은 전임 은행장이었던 벤저민 스트롱의 유지를 받들어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제공하는데 노력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연방준비은행에 대한 영향력이 스트롱만큼 높지 않았다는 점이다.



2대 은행장 해리슨  <출처 : 위키피디아>



타 연방준비 은행장들은 해리슨이 월권을 행사했다고 비난하는 한편 뉴욕 연준과 같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 연준 간의 엇박자는 향후 벌어진 추가적인 주가 폭락에 따른 유동성 공급에 대한 정책적 실수를 가져왔다.


1930년의 일시적 주가 상승


1930년 봄, 주식시장이 일시적으로 다시 움직였다.


1929년 10월에 발생된 하락폭을 어느 정도 회복하면서 서서히 기지개를 켰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이 상황에 고무된 후버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기업가들을 독려했다.



다우존스 지수의 움직임 <출처 : 위키피디아>



실업률을 낮추는데 효과가 높은 건설 사업에 적극 나서라는 지시를 하면서 연방정부와 주 정부 주도의 공공 건설 사업을 밀어붙였다.


부족한 건설 자금은 국가 예산을 증액해 지원해 나갔다.


이 결과 5월이 되자 어느 정도 고용에 대한 자신감이 붙은 정부는 ‘불황은 끝났다’라고 공공연히 연론에 홍보를 했다. 자신감에 가득 찼다.


하지만 폭탄은 엉뚱한 곳에서 폭발했다.


스무트 홀리 관세법의 시행과 파장


후버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을 지키고 선거에 표를 몰아준 농민들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1930년 6월 17일, 스무트 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에 최종 서명하였다.



스무트 홀리 관세법의 주인공인 리드 스무트와 윌리스 홀리 의원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법은 법안을 발제한 리드 스무트(Reed Smoot) 상원의원과 윌리스 홀리(Willis C. Hawley) 하원의원의 이름을 땄다.


스무트 홀리 관세법의 핵심 내용은 외국 수입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 부과였다. 평균적으로 55퍼센트에서 최고 400퍼센트까지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이 법의 실행으로 인해 약 2만 개 이상의 수입품에 대한 관세가 인상되면서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관세율이 적용받게 되었다.




미국의 관세율을 나타낸 모습. 1930년에 관세율이 폭등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결과적으로 미국의 무역 상대 국가들에 대한 보복관세가 이어지면서 대공황 기간 동안 미국의 무역규모가 약 67% 감소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


후에 경제학자들은 이 법이 대공황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동의했다.


사실 이 법은 농산물 가격의 하락과 불황으로 고통받는 농업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평가된다.


미국 내 농산물 보호를 위해 외국의 수입 농산물의 관세를 올리겠다는 취지는 좋았으나, 1929년 불경기에 따른 타 산업의 요구 조건이 추가로 덧붙여지면서 관세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산물도 중요하지만, 내가 삶을 영위하는 산업도 보호해 달라는 청원이 엄청나게 많이 몰려든 것이다.



스무트 홀리 관세법을 설명한 내용  <출처 : 위키피디아>



의회 내 의원들도 지역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의 조건을 수용하면서 실질적인 관세율을 높이는데 협조하였다.


무역 상대 국가의 보복 관세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미국에 수출을 하는 국가들은 이를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즉시 보복 관세를 올려 미국산 농산물을 비롯해 산업 전반에 걸친 미국산 상품의 관세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영향력이 미국 경제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던 경제학자들은 수 천명의 서명을 모아 이 법안에 절대 서명하면 안 된다는 탄원서까지 제출할 정도였다. 금융 종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제안은 무시되었고 결국 법안은 시행되었다. 막상 법안 시행이 되자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폭락하는 미국의 무역 경제 규모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져왔다. 급속도로 무역 경제 규모가 쪼그라든 것이다.




추락한 미국의 산업지수 모습 (1928~40)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의 경제역사학자 존 스틸 고든의 의견에 따르면, “1929년 세계 무역액은 총 360억 달러였다. 그러나 1932년에는 겨우 120억 달러로 감소한다. 1929년 당시 미국의 수출액은 총 52억 4100만 달러였으나, 3년 후에는 11억 61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자그마치 78퍼센트가 감소한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 해도 1896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영향일까? 가까스로 지탱하던 주가가 다시 폭락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주식 시장의 하락이 금융권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본격적인 은행 파산의 시작


1930년 파산한 은행의 수는 대략 1,352개였다. 마지막 11월, 12월에 사라진 은행만 600개였다. 1929년 대비 약 2배의 은행이 무너진 것이다.




유동성 공급을 표현한 그래프 <출처 : 위키피디아>



파산한 은행은 대도시에 위치한 것이 아닌, 가난한 이민자들의 예금으로 운영되던 작은 시골의 영세한 은행이 대부분이었다.


경제적 고통은 도시가 아닌 시골의 외곽 지역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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