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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Dec 12. 2021

은행 파산 증가와 실업률의 상승

1929년 미국의 대공황 09

1930년이 끝나기 전에 큰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뉴욕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은행'의 파산


소규모 은행의 파산은 하나의 이야깃거리였으나 뉴욕에 위치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은행(Bank of United States)'의 파산은 규모가 남달랐다.


이 은행의 주 예금자들은 뉴욕에서 삶의 터전을 영위하는 유대인이었고, 예금자 수가 대략 45만 명이나 되었다.


규모로 보나 덩치로 보나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던 은행이었다.



뉴욕 시내의 유대인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은행의 근본적인 문제는 경영진에게 있었다.


두 명의 전임 은행장이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갈 정도로 경영이 방만했고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울러 당시 유행했던 반유대주의 분위기로 '유대인 은행'이란 소문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


뉴욕의 주요 금융가들 눈초리도 차가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원활한 자금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구조였다.


하지만 수많은 지점을 갖고 있었고 예금액만 2억 7천만 달러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었다. '대마불사(Too Big to Fail)'라는 단어를 맹신하고 있었다.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의 외면


그래도 갑작스러운 대규모 인출 사태는 막지 못했다. 이는 1907년 파산한 니커보커 신탁회사 이후 최대 규모의 파산 사건이었다.



1907년 몰락한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뉴욕의 금융인들은 이 은행의 대량 예금 인출을 해결하기 위해서 약 3천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실행이 필요할 때 월가의 은행가들은 끝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이 날은 1930년 12월 11일이었다.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큰 은행이 망하다니, 내 돈을 빨리 찾아야겠다’는 심리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힘들게 모은 재산이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감이 순식간에 퍼져 버렸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은행 앞에 모인 사람들 <출처 : 위키피디아>



사람들의 불안감은 1930년을 넘어 그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1931년 경제 공황과 유럽에서의 암울한 소식


결국 1931년에 들어서 본격적인 경제 공황이 시작되었다. 1930년에 경기가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5월이 되자, 유럽에서도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유럽 강대국인 오스트리아의 최대 은행 중 하나인 ‘크레디트안슈탈트(Creditanstalt) 은행’이 파산했다는 내용이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은행은 1855년 로스차일드 가문(John Rothschild family)이 세운 은행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가장 큰 은행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패하고 제국이 해체되자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거래하던 주요 기업들의 자금 상황이 악화되면서 다시 한번 휘청거렸다. 간신히 버티는 와중에 미국발 대공황의 시작으로 결국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출처 : 위키피디아>



이렇게 커다란 은행이 넘어지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은행들이 줄을 어 연쇄적으로 문을 닫았다.


독일 경제의 급속한 침체와 다나트 은행 파산


가뜩이나 전쟁 배상금으로 힘들어하던 독일 경제는 이 영향으로 급속하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대내외적으로 금융 불황이 경제 불황으로 이어지자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몸이 달았다. 부라 부랴 미국이 유럽 국가에 받아야 할 채권과 독일의 전쟁 배상금 상환 시기를 모두 1년 연장해 주는 조건을 내 걸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반발로 지지부진했다.


이런 국가 간 공조가 흔들리는 와중에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이 무너진 지 두 달 뒤인 1931년 7월, 독일의 '다나트 은행(Danat bank)'도 문을 닫게 되었다.



다나트 은행의 전신인 다름슈타트 은행의 옛 건물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은행은 독일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은행으로, 1922년 두 개의 은행이 합병하여 탄생된 상업은행이었다.


이 은행의 파산으로 독일 은행 시스템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다른 은행에 대한 인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을 대비하여 독일 정부에 의해 강제적인 자본 통제가 시행되었다.  



1931년 7월 13일 다나트 은행으로 몰려든 사람들 <출처 :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시작된 불안감은 바다 건너 영국의 런던으로 옮겨 붙었다.


런던 금융가의 어려움과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자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그동안 꽁꽁 보관하고 있던 파운드(당시 기축통화 역할)를 싸들고 영국으로 건너 가 금으로 태환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영국 정부의 재정은 적자 상태였는데, 급격한 파운드의 금 태환 요구로 금의 유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더 이상 금본위제를 지켜낼 여력을 잃어버렸다.


결국 1931년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는 파운드를 사용하는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이는 미국 경제에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재무부 장관 시절의 처칠. 그는 1925년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를 시행했지만 1931년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의 뒤를 이어 대부분의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탈퇴하면서 오직 달러만이 금과 태환이 가능한 화폐로 유통되고 있었다.


늘어나는 달러의 금태환 요구


이제 미국으로 달려가 가지고 있던 달러를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급속하게 미국의 금이 유출되기 시작했고, 유동성 부족으로 이 해(1931년)에 미국의 은행 중 2,300여 개가 문을 닫았다.


이제 은행의 파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경제 위기가 닥쳐온 곳이다. 그 시작은 직장을 잃은 실업률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대공황 당시 미국의 실업률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상 삶을 영위하는 최후의 마지노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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