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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Dec 16. 2021

1932년 대공황의 여파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등장

1929년 미국의 대공황 11

1932년 실업률은 역사상 최고치인 20% 를 넘어섰다.


실업률의 증가와 경제 공황


실업률의 증가는 단순히 직업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경제 전반에 걸친 총체적 난국의 결과물이었다.




대공황 당시의 미국 내 실업률 <출처 : 위키피디아>



1931년 2,300여 개의 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통화량이 축소되었는데, 1932년은 상황이 더 심했다.


은행이 파산하는 공황 상태는 대도시를 넘어서 전국 단위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932년 가을부터 북부와 남부, 서부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은행의 휴업 사태가 계속 확산되었다. 사실상 금융 공황이라 할 정도로 시중의 유동성이 점차 줄어들었다.


유동성 감소와 무너져 버린 금융 체계


어려움에 처한 은행들은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지만 연준(Fed)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최악의 사태가 발생되면서 전국의 은행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대공황의 암울함을 표현한 대표적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1929년부터 33년 초까지 대공황 기간 동안 약 1만 1,000여 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영향으로 통화의 공급량도 크게 줄었는데 그 비율이 30%나 되었다.


시중에 돈 구경하기가 힘들어지면서 자금을 융통하지 못한 기업들도 차례로 문을 닫았다. 연쇄적으로 도산한 것이다.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과 높은 실업률


이 결과 회사에서 쫓겨난 이들이 거리를 헤매기 시작하면서 실업률이 치솟았다.


돈이 없는 이들은 더 싼 물건, 더 저렴한 상품을 찾기 시작했고 유동성 부족에 따라 물건 값이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했다.


기업이 팔려는 상품 가격은 계속 하락했고 이마저도 판매가 늘지 않았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더, 더' 하면물건 값이  계속 떨어지기만을 기다렸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회사들이 문을 닫기 시작한 것이다.



직업을 구하기 위한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물가의 하락률은 약 37%였고 농산물은 이보다 더 심한 65%의 하락률을 보여주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런 결과로 3% 대에 머물던 실업률이 급격히 올라 20%를 넘어선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의 우울함이 시작되었다.


'후버 빌'과 굶주리는 국민들


다 해진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를 해결하기 위해 무료 급식소에 줄을 길게 서서 얻어먹는 생활이 시작됐다.


집을 잃어버린 이들은 판자로 만든 집에서 노숙자같이 모여 살면서 생활했다. 이런 형태의 모습을 일명 '후버 빌(Hooverville)'이라고 불렀다.


비슷한 용어로 '후버 가죽(Hoover leather)'은 구멍 난 신발 밑창에 덧대어 쓰는 골판지를 뜻했고 '후버 담요(Hoover blanket)'는 몸을 덮고 자는 얇은 신문지를 의미했다.



대공황 당시의 후버 빌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굶주린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다. 이와 반대로 농촌에서는 팔리지 없는 농산물을 갈아엎었고 가축들을 폐사시켰다.


자본주의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이런 침체된 경제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유동성 공급이 필요했다.


후버 대통령의 어설픈 경제 정책


하지만 연방정부는 세입과 세출의 균형을 맞추는 예산 편성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어, 과다한 정부 지출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발표한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은 1936년에 나온 것으로,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이와 같은 의견을 내는 이가 없었다.



1930년대 초 미국 실업자 가정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연방정부가 경제를 회복하고 늦게 진행한 예산적자 시행은 가까스로 진행이 되었으나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다행히 과거 사업적 경험을 되찾은 후버 대통령이 밀어붙인 '부흥 금융 공사(Reconstruction Finance Corp, RFC)'의 설립으로 일부 계층이 경제적 회생의 도움을 받았다.


부흥 금융 공사(RFC)의 설립


하지만 긴급 자금을 대출받은 이들은 일반 국민들보다 은행, 철도회사 등 주로 기업체와 금융가였다.


초기 시행 6개월 동안 약 12억 달러를 대출했고, 이는 연방정부 예산의 25%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 제도는 추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도 활용될 정도로 급한 불을 끄는데 효과가 있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래도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공황에 따른 경제적 손실


결과적으로 대공황이 끼친 경제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실업률이 과거의 3%되돌아갈 수 있기까지 1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주가지수도 1929년 고점을 되찾는데 무려 25년의 세월이 걸렸다.


미국의 GDP도 30% 이상 추락하여 사실상 미국인들의 삶도 상상 그 이상으로 비참하게 락했다.



대공황 당시 미국 GDP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과 연결된 전 세계 경제도 동반 추락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당선


결국 1933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인들은 루스벨트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주었고 후버 대통령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뉴딜 정책의 시행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진행된 뉴딜(New Deal) 정책은 대공황이라는 수렁에서 탈출하는데 일조했고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불황을 완전히 극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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