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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22. 2020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 선언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30

1861년 4월 12일, 남부연합의 군대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남북전쟁이 시작됐다.


남북전쟁의 발발


당시 남부와 북부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북부의 경제적 여건은 남부를 압도하고 있었다. 공업의 차이는 물론이고 농산물 생산력과 인구수(북부 2,100만 명, 남부 900만 명)도 차이가 컸다.

 

섬터 요새 공격  <출처 : 위키피디아>


그렇지만 남부에는 잘 훈련된 군인과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 1807~1870)라는 걸출한 장군이 있었다. 북부에는 훈련을 받지 못한 군인과 탁월한 리더가 부족했다.


전쟁 초기 남부연합은 연전연승했고 북부군이 한없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전쟁은 경제력이 받쳐주어야 유지할 수 있었다. 누가 먼저 경제의 방향을 전쟁에 유리하게 만드냐가 중요한 관건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전쟁 초기에 남부와 북부는 돈에 허덕였다.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  <출처 : 위키피디아>


1857년부터 진행된 불황은 연방정부의 재정상태를 적자(당시 부채는 약 6,500만 달러였다)로 만들었다.  간신히 국가 살림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겨우겨우 단기 차입으로 적자를 메꾸고 버티던 와중에, 전쟁이 터지면서 하루하루 야 할 돈이 급격하게 치솟았다.


남부와 북부의 군비 조달 방식


당장 눈 앞에 닥친 엄청난 비용 청구서를 바로바로 승인해야 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3가지였다.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조세수입을 증가시키는 것, 외국(특히 유럽 국가)에서 돈을 빌려오는 것,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다. 북부와 남부 이 세 가지 수단에 의지했다.


북부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세수 수입을 만들었다. 소득세의 신설이었다.


당시 재무장관은 샐먼 P. 체이스(Salmon Portland Chase, 1808~1873)였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새로운 조세 수입을 위해 노력했다.



샐먼 P. 체이스(Salmon Portland Chase)  <출처 : 위키피디아>


소득세로 늘어난 세금은 전쟁 비용의 20%까지 충당했다.


두 번째는 돈의 차입이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돈을 끌어 와 부채비율이 단번에 치솟았다(1861년 6,500만 달러에서 4년 뒤  27억 5,500만 달러로 42.5배나 급증했다) 이로 인한 이자 비용도 당연히 늘어났다.


세 번째 자체적 화폐의 발행은 ‘그린백(Greenback)’이라는 증서 화폐를 새로 발급했다.


이는 금과 교환이 되지 않는 불태환 지폐로 약 4억 5천만 달러어치 발행이 된다. 그린백 남발은 이후 인플레이션 발생의 원인이 된다.


이때까지 연방정부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린백 발행을 계기로 금본위제를 포기한다.



1달러 그린백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부의 상황은 북부보다 열악했다.


먼저 조세수입을 위해 목화의 수출이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직후 노예들이 농장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생산력의 감소는 급격한 목화 생산량 감소로 이어져 수입이 줄어들었다.


북부의 해안 봉쇄로 유럽에 수출할 통로까지 막히게 되어 경제적 역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남부도 차입을 위해 전쟁 채권을 발행하게 된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 방안을 마련하지만, 대농장주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된다.


결국 남부 연방의 자체 화폐 발행으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게 된다. 지폐의 남발로 생겨난 살인적 인플레이션은 가뜩이나 어려운 남부 경제에 치명타를 안겨주었.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


북부의 결정적 한 방이 나왔다.


1862년 9월 링컨 대통령(Abraham Lincoln, 1809~1865)이 서명한 ‘노예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이었다. 효력은 1863년 1월부터 발휘되었고 이 선언으로 전쟁의 명분은 완전히 북부로 넘어갔다.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북전쟁의 명분은 ‘갈라진 연방의 통일’이었다. 노예 해방이라는 주제가 생기면서 북부에게 ‘연방의 통일 + 노예 해방’이라는 도덕적 명분이 추가된 것이다.


1863년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인근에서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에서 북부가 승리했다. 남북전쟁의 극적 전환점이 생겼다.


1865년 4월, 북부가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남북전쟁은 끝이 다. 북부의 승리로 연방은 다시 하나가 되었고,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  <출처 위키피디아>


남북전쟁 당시, 남부에 목화가 있었다면 북부에는 밀이 있었다.


북부의 대규모 밀 농장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수확을 하는 시기가 매우 짧다는 점이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매코믹의 수확기였다.


북부의 밀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영국으로 수출이 이루어졌다. 양이 많았다.


영국이 남부의 정부 승인을 미루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북부의 밀 수출 이었다. 북부의 심기를 건드려 수입이 막히는 것을 염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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