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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23. 2020

제이 쿡(Jay Cooke)의 채권 판매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31

남북전쟁의 승리를 결정지은 사람은 북부의 그랜트 장군(Ulysses S. Grant, 1822~1885, 제 18대 대통령)이다.


그는 1863년 7월 남북전쟁의 격전지인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Battle of Gettysburg)에서 결정적 승리를 했다. 이 전투로 확실한 승기를 잡고 1865년 봄, 남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종결을 지었다.


그랜트 장군(Ulysses S. Grant)  <출처 : 위키피디아>


제이 쿡(Jay Cooke)의 전시채권 판매


전투의 승리가 그랜트 장군 역할이었다면, 경제적 승리를 가져온 사람은 채권왕이라 불리는 ‘제이 쿡(Jay Cooke, 1821~1905)’ 이었다.


그는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10대 시절, '제2 미국은행'에서 업무를 배우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다른 총명함과 금융 감각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E.W.클라크(E. W. Clark & Co.) 라는 작은 금융회사에서 일하며 채권 판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회사는 대출업무 보다는 텍사스공화국(Republic of Texas)의 채권을 판매하고 있었다(텍사스공화국이 미국에 편입되기 전이다)


하지만 1858년 불황으로 회사가 문을 닫자 필라델피아로 돌아왔다.


1861년 남북전쟁 발발 직전 ‘제이 쿡 컴퍼니(Jay Cooke & Company)’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가 벌인 첫 사업은 필라델피아 주 정부가 발행한 전시채권(war bond)를 인수해서 파는 일이었다.


제이 쿡(Jay Cooke)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전시채권을 은행과 유럽 투자자들에게 일괄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금액을 잘게 쪼개어 일반인들에게 나누어 판매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성공을 했다.


이후 재무장관인 샐먼 P. 체이스(Salmon Portland Chase, 1808~1873)를 만나 연방정부(당시 북부) 전시채권(War bond)를 판매하는 계약을 맺게 되고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당시 뉴욕 월스트리트 금융권과 유럽 투자자들은 북부의 전시채권 매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기존 방식이 아닌, 개인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개인들이 입하기 쉽게 채권 금액을 나누어 액면가를 소액으로 만들어 냈다(최저 금액인 1,000달러 공채를 50달러 20장으로 만들어 낸 것).

 


재무부장관 시절의 샐먼 P. 체이서 <출처 : 위키피디아>


매입 금액도 나누어 납부 할 수 있게 했다.


채권을 매입한 개인들은 장기투자를 선호하고 있어 안정적인 판매만 이루어 진다면 연방정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수요를 넓혀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이 채권 판매를 위해 전국에 약 2,500 개의 판매대리인을 모집했다. 홍보를 위해 광고대행사를 통한 대규모 신문 광고도 집행했다. 채권 입의 미담 기사를 게재하여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문구는 국가를 해 무언가 도와야 겠다는 열망을 자극했다. 아울러 자산 증식의 효과를 기대하는 경제적 동기까지 겹치면서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안정적인 전쟁자금이 마련되면서 북부의 경제 상황도 나아졌다. 금으로 교환이 되지 않는 불태환지폐인 ‘그린백(Greenbacks)’을 더 찍지 않아도 되다(인플레이션 억제에도 효과가 있었다).


사람들 집안 곳곳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잠재적 자산들을 시장으로 이끌어 내어 생산적 활동에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 냈다. 채권의 대중화가 열린 것이다.


남부의 전시채권


이에 반해 남부에서도 전시채권(War bond)를 판매했다. 목화를 기초자산으로 한 ‘면화공채(Cotton Bond)’ 였다.


면화공채는 유럽의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판매하고자 남부의 화폐가 아닌 유럽의 화폐로 사고팔수 있게 만들었다.


남부의 7퍼센트 면화공채(Cotton Bond)


그 이유는 남부의 화폐는 신용도가 높지 않아 투자자들이 원금을 손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다.


채권은 매입하면 언제든 사고 팔수 있었고, 원하는 시점에 남부의 목화와 교환 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었다(당시 목화 1파운드당 6펜스 였고 국제 시세는 24펜스 였다. 그 차액만큼 이익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채권 판매로 약 300만 파운드를 얻을 수 있었으나 문제는 전쟁에 사용하기에 너무도 적은 금액이었다.


결국 해결 방법은 하나였다. 지폐를 발행하여 전쟁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폐 남발로 인한 남부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왔고 극심한 사기저하를 불러왔다(남부의 물가상승률은 900% 였고 북부의 물가상승률은 80% 였다)


제이 쿡의 역할과 업적


이러한 상황에 비춰보았을 때, 제이 쿡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남군의 한 장군은 심지어 “적어도 우리는 전쟁터에서 북군에게 패하지는 않았다. 우리 군대를 거꾸러뜨린 것은 다름 아닌 제이 쿡이다” 라고 말하며 남부가 갖고 있지 못한 그의 능력과 역할에 크게 아쉬워 했다.



북태평양 철도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국채 판매는 꾸준히 이루어졌다. 판매된 돈은 전쟁 이후 복구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이 쿡은 막대한 수수료를 어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이 많은 재산을 이용해 북태평양 철도사업(Northern Pacific Railway)에 투자했다.


하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하다가 1873년 공황(Panic of 1873)을 맞아 파산을 했다. 이후 광산 개발로 재기에 성공해 결국 부자로서 삶을 마감했다(그의 희망은 부자로 죽는 것이었다).


남북전쟁이라는 위기에서도 막대한 자금을 조달했다는 점, 새로운 방법으로 채권의 대중화를 이룬 점은 그의 뛰어난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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