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걸 흘려보낸 죄

사는 데도 휴식이 필요했는데.

by 이춘노

어릴 적에 아버지는 중동에서 산 카메라를 가지고 내 모습을 제법 찍어 주셨다. 당시에 카메라는 비싸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마구 찍어서 보내고 저장하는 방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비싼 필름으로 현상을 맡겨서 엉성하게 찍은 사진 하나도 쉽게 버리지 못했던 귀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1인 카메라 시대되어서 이렇게 꽃이 피면 누구나 사진을 찍고 남기고 주고받는다.

기술을 떠나서 사람이 원래 그런 존재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에는 그림을 남겼고, 글로 남겼고, 이야기로 구전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을 귀하게 여기면서 즐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남들이 꽃을 구경하러 가면 책을 보았고, 티브이를 보았고, 유난을 떤다면서 비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정말 할 일이 없나 보다. 그러니까 저렇게 줄지어서 꽃이나 보러 다니지.'

그렇게 한심한 듯이 쳐다보는 것이 내 30대까지의 생각이었다.

그러던 내가 시간을 내서 꽃을 본 것이 아마 처음 휴직하고 갔던 곡성 장날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차를 타고 곡성에 갔다. 그리고 하늘도 푸르고, 하얀 꽃나무가 이쁜 천변을 보고 나니 그렇게 아름답다는 섬진강의 벚꽃이 보고 싶었다.

당시는 코로나 시기라서 여행도 자유롭지 못했기에 그냥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그 자체가 신세계였다. 꽃터널도 영상으로 보았지, 실제로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자 떨어지는 꽃잎을 잡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온 시내가 하얀 꽃나무로 가득한 구례읍내를 돌면서 진정한 꽃구경에 심한 충격을 받고는 이렇게 봄에는 그래도 혼자서라도 주변에 꽃나무를 조금씩 사진을 남기곤 한다.

익숙한 내 주변에 공간이지만, 꽃이 피었다고 새롭게 보인다는 것은 너무 억지스러울까? 매년 피는 꽃임에도 알면서도 망각하는 존재라서 그런지? 그 자리에 핀 꽃이 매번 새롭다. 날씨 영향일지. 아니면 마음의 영향일지 모를 매번 다른 사진의 질감은 또한 왜 그럴까?


나는 그간 너무 휴식이 없이 달려왔다. 여기서 말하는 휴식은 방에서 조용히 누워서 숨죽이고 잠을 자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긴장감과 환경의 변화를 주는 감각적인 쉼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런 쉼이 너무 부족했다. 정확히는 익숙하지 않아서 기화가 오더라도 잘 활용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러한 반작용으로 늦은 나이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가끔은 불필요해 보이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게 취미기도 하고, 여행이기도 하며, 가끔은 일탈이라고 불리는 그것.

내가 아마 내 인생이 망해가는 것이라 느낀 것도 그 결핍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지. 꽃을 보다가 그 아름다움을 놓친 죄로 천변을 빙빙 돌다가 문뜩 동해가 보고 싶어졌다.


아..

가야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해는 보고 와야 할 것 같은 오늘 꽃비를 맞으며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