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이 Oct 03. 2020

그래도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다고

말하고 싶네

#
태어난 건 참 감사한 일이지.
살아볼 만한 인생이야.
이 세상이 그래도 참 재밌는 곳이더라고.


#
아무것도 없이 왔다가 많은 것 이루어 놓고 다시 아무것도 없이 돌아가니 그래도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나 싶어.
그 누구도 저승에 무얼 가지고 갈 수가 없잖아.


#
신의 공평함은 무심함이라지.
그저 우리 삶에 개입하지 않음으로 그 공평함을 유지한다고.

내가 병이 들고 알았지.
신이 고쳐주는 건 없더라고.

그 누구도 신이 어느 날 낫게 하지는 않아.
그저 치료가 잘되고, 안된 사람들이 있을 뿐


#
힘들 일도 있었지.

그저 평범하게 잘 살아왔지.
월급쟁이 월급 안 밀리고 매달 통장에 돈 꽂히면, 그것만큼 감사한 일이 없더라고.
그 월급 가지고 마누라랑 결혼하고 자식새끼 낳고 내 보금자리 일구고 잘 살았다고.

그런데 정년을 못 채우고 퇴직을 하게 됐네.
그 뒤로 무언가 해 먹고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어.
너무 세상을 몰랐지.
여기저기 투자하다가 퇴직금도 다 날리고 빚까지 지게 됐는데, 아이들은 아직 대학생이었다고.
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큰애가 휴학을 했는데...

그때는 너무 힘들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그리 큰일도 아닌데 말이야.



#
원인도 모르겠는데...
오랜만에 만난 옛 회사 동료가 살이 너무 빠진 것 같다는 거야.
형님 건강 검진하시냐고.
그런 거 모르고 살았지.
소속된 회사도 없고, 일하기 바빠서 건강검진 같은 거 뭐 챙기고 살 여력이 있나.

오랜만에 체중계에 올라가 보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 해에는 국가 건강검진을 받았지.



#
큰 병원을 가보라더라고

병원에 갔더니 또 뭐 추가로 CT를 찍고...
폐암 4기를 진단받았지.



#
하늘이 노래지더라고.

우리 둘째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우리 첫째 딸, 토끼 같은 손주들 학교 가는 거 봐야 하는데,
우리 마누라는 나 없으면 어찌 밥 벌어먹고 사나.
노래진 하늘 위로 가족들 얼굴이 스쳐가더라고.

그리고 출근 걱정이 들대.
힘들게 다시 구한 일자리 당장 어쩌나
나는 곧 다시 잘리겠구나.

내가 폐암 4 기라는데도.
참나
그런 걱정이 들더라고.
몸에 베인 습관 같은 건가.
매일을 일할 걱정하고 살았으니 말이야.




#
수술은 할 수가 없고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한다더라고
예후 같은 건, 사람마다 너무 달라서 말해주지는 않는대.
그렇지.
사실 사람이, 그것이 아무리 지식에 기댄다 할지라도 사람의 명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의사가 명을 말해주지 않는 게 왠지 모르게 더 신뢰가 가더라고.

어제 보니 졸음운전으로 명을 달리 한 화물트럭기사 뉴스가 나오대?
그 양반이 어제 죽을 줄 알았겠는가?
암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어.
치료는 힘들고.
가끔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

마누라 자식들 후회 없게 해 주려고,
그리고 나 역시 해보는 데까지 해보려고 버티고 있는데
가끔은 딱 그만두고 싶더라고.
치료가 아주 고역이야.




#
오늘 당장 죽으면 뭐가 제일 후회될까 생각해봤는데,
딱히 떠오르지 않더라고.
뭐가 제일 아쉬울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떠오르지는 않아.

뭐 남은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손주들 더 보고 싶고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운명이 뭐 내가 정해놓은 그대로 가던가 어디.

그래도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거 보면
내가 꽤 잘 산 것도 같아. 허허


언제 떠나도
떠나는 길 그래도 꽤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다고 말하고 싶네.

이전 17화 도망치고 싶었지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