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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남순 Sep 21. 2024

적응의 시간

아이들이 새 학교와 새 친구들을 사귀며 시골 생활에 적응하는 사이,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야 했다.

시골 이웃들은 적극적이다. 밭을 일구거나 작물을 심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안부를 확인한다.

"배추 심고 있시캬? 배추 모 잘 샀네. 할 만 하이캬?"

처음에는 독특한 이곳의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밥 드셨시꺄?” 혹은 “뭐 하시꺄?”, “어디 가싰꺄?”하는 말끝에 붙이는 ‘시꺄’라는 말을 ‘새끼야’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뭐라는 거야? 왜 우리한테 새끼야, 새끼야 하지?” 남편도 고개를 갸웃하며 “설마 새끼야 라고 했겠어? 우리가 못 알아듣는 거겠지.”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어디다 대고 물어보기도 애매했다. 나중에서야 그 말이  이곳 사투리라는 것을 알고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말끝만 달라지는 지역사투리가 재밌어서 가족들끼리는 사투리로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밥상을 차려 놓고 인상을 팍 쓰고는 “밥 먹어 시꺄” 하고 큰 소리로 말한다. 문제는 상대가 알아챌 틈도 없이 제풀에 웃겨서 그만 푸하하 웃고 말지만.

새로운 환경에서는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성당 미사가 끝나고 난 뒤 지렁이 눈썹을 한 사람이 남편에게 다가가 뭐라고 한참 이야기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말했다. “회장님이 이따 6시에 저기 요셉 형님 집으로 오라고 하네.”

“왜?”

“몰라. 저녁이나 함께 먹자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어. 당신도 같이 오래.”

“나도?”“응.”

“오늘 저녁은 카레나 끓여놔야겠다.” 뒷 자석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카레 어떰? 좋시꺄?”

“좋시다.” 큰 아이가 대답했다.

“창이는?”

“저는 라면이 더 좋은데....”

“둘이 합의해서 말해주시겨. 라면이면 엄마는 더 좋고.”

“알겠시다.” 큰 아이가 대답했다.      

요셉 형님댁은 처음이다.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는 2층집은 아래층은 세를 주고 위층에서 두 분이 살고 있다. 마당에는 반송이 여러 그루 심어져 잘 손질되어 보기 좋게 자라고 있다. 마당 구석으로 창고로 보이는 부속 건물이 한 채 있고 그 옆으로는 저온창고로 보이는 것이 놓여 있다. 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마당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안정감을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전에 성당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여럿이 있다. 우리만 초대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이 되면서도 무슨 일로 사람들이 모인 것일까 궁금했다.

주방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과 거실에 있던 남자들이 모두 일어나 우리 부부를 반겨 주었다. 우리를 초대했던 회장님 부부 얼굴도 보였다. 오는 길에 동네 가게에서 산 음료수를 식탁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았더니 집주인인 안젤라 형님이 뭘 이런 걸 사 오냐며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신다. 보아하니 일찍들 오셔서 함께 음식을 준비한 것 같다. 이들 중 가장 젊은 우리가 가장 늦게 와서 밥만 먹게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자들이 거실에 상 두 개를 펼쳐놓고 행주를 가져와 상을 닦고 음식을 날랐다. 나이 먹은 남자들이 스스럼없이 여자들의 일을 한다. 이곳은 남녀가 유별하지 않는 곳 인가보다.

상에 차린 음식이 푸짐하다.

갈비를 집어 먹으며 “맛있어요.”라고 말하자 루갈다가 말한다. “그건 형님이 했어. 원래 형님이 갈비를 잘해.” 하며 웃었다.

나물을 집어 먹으며 “어머, 이건 피마자 잎 아니 예요?”라고 묻자 헬레나 형님이 말한다. “그건 누갈다 형님이 해 온 거야. 형님이 나물을 잘 무쳐.”

“아... 나물을 해 오셨구나. 집에서 키우신 거예요?”라고 묻자, “응 우리 집에는 해마다 피마자를 키워.”라고 누갈다 형님이 대답했다.

“이건 다른 나물하고 똑같이 만드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응. 똑같아. 이파리 뜯어서 삶아 말렸다가 나중에 물에 불려서 들기름 넣고 볶으면 돼.” 누갈다 형님이 소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사라는 술 안 마셔? 한 잔 줄까?”

“아니요. 저는 이따 운전해야죠.”

“아... 그렇지? 술 마실 줄 알지?”

“네. 잘 마셔요. 호호호.”

내 말이 웃겼나? 주변에 있던 형님들도 하하하 호호호  함께 웃었다.

저쪽 상에 앉은 남편을 건너다보니 지렁이눈썹회장님과 사베리오, 그리고 남편이 연신 술잔을 주고받고 부딪치며 술잔이 허공에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신나셨다.   

  

회장님이 숱 많은 지렁이 눈썹을 크게 꿈틀 하더니 반 무릎으로 일어서 잔을 들었다.

“자, 자. 바쁘시겠지만 잠시 지방 방송 끄시고 막 잔 건배를 하고 우리 자리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 지방방송을 틀어대고 있던 사람들이 일시 조용해지며 앞에 있는 술잔을 들었다. 모든 사람 잔에 술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술을 못 마시거나 혹은 마시지 않기 때문에 물이나 음료가 잔을 든 사람이 대부분이다.

“누가 사랑하는 우리 누갈다 잔 좀 채워줘요.” 사람들이 들고 있는 잔을 보던 지렁이눈썹회장님이 말했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앞에 앉은 로마노가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우며 말했다. “아이고 누님,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누갈다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호호호, 저이는 괜히. 이제 그만 마시려고 했고만. 호호호.”

“자 그럼 내가 ‘99’하고 외치면 여러분들이 ‘88’하고 외쳐주시면 됩니다. 아시죠?”

“네~에!” 벙글벙글 웃으며 사람들이 대답했다.

“99” 지렁이눈썹회장님이 외쳤다.

“88” 사람들이 외쳤다.

“자, 우리 구십 구살까지 팔팔하게 살아보자고요” 그리고 지렁이눈썹회장님이 말을 이었다.

“자, 상을 정리할 사람들은 정리를 좀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2부 준비를 좀 해 주세요.”

그러자 남자들이 상을 들어 주방으로 옮겨 주었고 가장 나이가 적은 사라는 벌써 싱크대 앞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누갈다와 집주인인 안젤라는 음식을 정리하고, 헬레나와 안나는 과일을 깎으려고 칼과 접시를 챙겨서 식탁 의자에 앉았다.

한편 집주인 안젤라의 남편 요셉은 걸래를 들어 바닥을 훔치고 지렁이눈썹회장님과 로마노는 벽에 붙은 달력 두 장을 찢고 펜을 챙겨 자리에 앉았다. 바닥을 훔친 요셉이 군용 담요 두 장을 가지고 와서 거실 이쪽과 저쪽에 펼쳐 놓았다.

“거기, 여성분들 설거지 다 했시갸? 다 했으면 어서들 이리로 모이시겨.”      

설거지를 끝낸 여자들이 과일을 담은 접시를 가져다 담요가 깔려 있는 주변에 하나씩 놓고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편을 어떻게 먹을까요?” 누갈다가 사람들을 행해 물었다.

“뭐 어떻게 먹긴 어떻게 먹어? 잘 먹어야지.” 지렁이눈썹회장님이 실없는 말을 한다. 실없는 농담은 그의 특기이자 장기이다.

지렁이눈썹회장님은 신문이나 잡지를 보다가 재미있는 유머를 찾으면 가위로 오려 노트에 붙였다. 그렇게 해서 모은 유머집 노트가 열 권이 넘는다. 지렁이눈썹회장님의 소원은 언젠가 그 유머집을 인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는 그가 수집한 유머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다.     

“그럼,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쪽으로 앉고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쪽에서 앉으시겨.” 로마노는 아까 찢은 두 장의 달력 중 하나와 펜을 안나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요셉과 지렁이눈썹회장님, 헬레나와 안나, 빈첸시오가 한 편을 먹고 다른 편에는 안젤라와 누갈다, 사베리오와 로마노, 내가 한편이 되었다.

“오늘은 몇 점내기야?” 모두 자리에 앉은 뒤 누갈다가 저쪽 편으로 몸을 틀어 물었다.

“100점.” 지렁이눈썹회장님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벽시계가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은 곧 두 패로 나누어서 화투놀이를 시작했다.

화투를 가지고 하는 이 놀이는 ‘나이롱뽕’ 또는 ‘뽕’이라고 부르는데 고스톱보다 단순해서 금방 배워서 함께 할 수 있었다. 화투의 같은 그림의 짝을 맞추거나, 또는 화투에 정해진 숫자를 연속되게 배열한 사람이 ‘스톱’을 외치면 게임이 끝난다. 스톱을 외친 사람의 점수는 플러스로, 나머지 사람들의 점수는 마이너스로 계산되기 때문에 머리를 잘 써야 하고 더하기 빼기 기술력도 있어야 한다. 각 팀에는 기록자 한 사람이 있어서 매 게임마다 계산된 모든 사람의 점수를 달력에 기록해서 가장 먼저 목표한 점수 100점을 성취한 사람(팀)이 이기게 된다. 목표한 점수에 먼저 도달한 팀이 그날의 승자가 된다. 그러나 승자든 패자든 의미는 없다. 그냥 게임에 이긴 사람은 이겨서 좋고 진 팀 사람들은 재밌는 시간을 보내서 좋았던, 모두가 즐거운 아주 유익한 게임이었다.

 

9시 반경에 게임이 끝이 났고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술이 취해서 휘청거리는 사람도 없고 밤이 늦어 피곤한 사람도 없고 게임에 져서 돈을 잃어 기분 상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행복한 이런 모임이라면 몇 번이고 더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임의 중심에는 지렁이눈썹회장님 부부와 요셉 형님 부부가 있다. 아니 정확히는 지렁이눈썹회장님이 주축이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같은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세례명이다. 지렁이눈썹회장님은 회장직에서 물러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회장이었던 그들의 호칭을 변경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는 성만 다른 회장님들이 많다. 박 회장, 장 회장, 황 회장, 이 회장 등. 그들은 동네에서 존경받는 원로들이다.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그들이 하는 말은 가볍게 취급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기 약 5년 전 지렁이눈썹 회장님이 회장직을 맡고 있을 때 지금 성당 건물을 지었다. 땅을 희사한 사람도 신자였고 농산물을 키워 도시에 내다 팔아 기금을 마련한 사람들도 신자들이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성당을 지은 사람들은 자긍심이 무척 크다. 지금까지도 그때  이야기는 '나 때는 말이야~'로 반복된다. 어떤 이야기들은 반복되어도 지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신앙의 힘으로 똘똘 뭉쳐 무언가를 성취해 낸 그들의 이야기가 그랬다.

 

'뽕' 모임의 모태가 되는 모임은 <부부 사랑>이다.  ‘나 때~’ 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이 ‘가정의 화목은 부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에 주목했던 사람들이 시작한 모임이다. 그러니까 ‘부부 사랑’ 모임은 신앙이 바탕이 된 모임이다. 그들은 신앙생활도 부부생활에도 열심한 사람들이다.     


부부사랑 멤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 이사 온 미국식 전원주택에 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우리 마당 한쪽에 흑염소가 매여져 있었다. 흑염소는 줄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구네 것인지 모를 염소가 매일 우리 집 마당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속편할리는 없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아침이면 나타난 염소가 저녁이면 어느 틈에 사라졌다.

궁금증도 지쳐갈 무렵이 되었을 때 염소가 뒷집 박이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박이 아빠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 주었다.

“박이네 엄마가 몸이 약하대. 그래서 박이 아빠가 염소를 키워서 염소즙을 만들어 먹인대.”

“어머, 진짜? 어머머머. 박이네 형제가 많은 이유가 있었네. 호호호호.”

염소에게 사랑꾼 남편의 사연이 있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연에 얄미운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혹시 내 남편도 염소 한 마리 키우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봤지만 동네에 사랑꾼은 하나면 족하대나 어쩐대나 하는 소리나 듣고. 흥! 첫! 뿡!이다.

박이 아빠와 엄마도 초창기 <부부 사랑>모임 회원이었으며, 밤이면 부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드라이브를 다녔던 로맨틱 바이크 커플이었다는 질투 나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과 기도도 함께 하고 농한기 철이면 가끔씩 모여서 이렇게 저녁도 먹고 뽕도 치며 논다.     


지렁이눈썹회장님은 지역 활동에도 열심이다. 한 번은 지렁이눈썹회장님이 하고 있는 도시락 배달에 따라간 적이 있다. 한 달에 두 번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자원봉사인데 차가 있어야 가능한 봉사이다. 지렁이눈썹회장님의 차를 타고 함께 도시락을 배달하고 나오는데 회장님이 조금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곧 저 양반들처럼 될 텐데.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들어요.”

도시락을 받은 노인들은 혼자 사는 분들로 대부분 신체가 많이 노쇠한 분들이다. 그들은 사람이 그리운 분들이다. 도시락을 가져와서 반가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방문이 반가운 분들이다. 그래서 그분들은 도시락을 들고 올 사람을 기다린다. 도시락을 전해 주는 손에 사탕 몇 개를 쥐어준다. 자식들이 사다 준 것을 먹지 않고 가지고 있던 사탕이다. 사탕을 쥐어주는 손이 얼음장처럼 찼다.

‘어디 회장님뿐일까요. 우리 모두 맞닥트릴 모습이네요.’

스산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애써 웃는다. 차에는 아직 배달할 도시락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지렁이눈썹회장님과 동행하면서 소소하지만 중요한 어떤 것들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왜 도시를 떠나 이곳에 왔는지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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