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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 Dec 29. 2020

어쩌면 우리가 지나쳤을 것들

1시간 34분간의 여의도 대장정에서 찾은 행복

주말 오전 날씨가 좋아서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걷고 싶어서 걸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날들의 나는 항상 목적지를 정하고 걸어갔고, 그렇게 살아왔다. 회사를 갈 때도 그랬고, 친구들을 만날 때도 약속 장소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과 장소의 압박에 수많은 풍경들을 놓치고 있었고, 그 시간 속의 자유마저 잃어버린 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 나는 정해진 목적지와 약속시간이 없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평소 지나치던 골목이 이쁘게만 보였고 들뜬 기분에 발걸음 또한 가벼웠다. 수산물 시장의 비린내도 평소 같았으면 인상을 찌푸렸겠지만, 오늘은 왠지 싫지 않았다.

다시봐도 이쁜 골목이다. 이것 또한 내가 놓치고 있던 풍경이겠지

오늘 본 골목의 풍경과 시장의 비린내는 언젠가 서울을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았다. 사실 서울의 이런 모습들이 나한테는 정말 필요했던 모습들이었다.


20대 사회 초년생으로 살아가면서 서울이라는 벽은 나에게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소소한 월급을 모으고 모아도 집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고, 좋은 아파트와 외제차를 보면서 나는 점점 작아져만 가고 있었다. 그런 답답함들이 주말의 나를 밖으로 내쫓은 걸지도 모르겠다.


사람 냄새와 서울의 반전 매력을 느끼면서 30분을 걸었더니 저기 멀리 63빌딩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본적 없었기에 나는 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날이었으니까. 그렇게 목적지가 없던 나에게 63빌딩은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 주었다.

출발지 기준을 1시간 34분. 이제와서 말하지만 1시간 34분은 걸어가는 거리가 아니다.

1시간 34분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받아들고, 63빌딩을 향해서 열심히 걸어갔다. 물론 목적지가 생겼다고 해서 서두르거나 주위의 풍경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눈에 가득가득 담았다. 시장에서의 사람들은 마스크를 썼지만 할인행사 때문인지 활짝 웃고 있었고, 산책 온 강아지도 신이 났는지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지나가면서 만난  영의정, 자전거. 그리고 한참을 더 걷고서 만난 국회의사당

재택근무를 하면서 뉴스로만 현실을 접한 나는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1시간 동안 마스크를 쓴 채로 걸어가면서도 알 수 없는 만족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내 모습처럼

63빌딩이다.

그렇게 나는 1시간 34분을 걸어서 63빌딩에 도착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큰 감동이나 행복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미 잠실타워를 보면서 고층 빌딩에 익숙해져 있었고, 두다리는 아파오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보다 도착과 동시에 사라져버린 목표는 나에게 허탈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래서 나는 재빠르게 다른 목적지를 찾기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여의도 한강공원이 있어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처음에는 분명 동네에서 시작한 자유와 행복의 발걸음이었는데, 무거워진 발걸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목적지를 정하면서 나는 또다시 나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에 아직 완벽하게 적응하지는 못했나 보다.

다시 억압된 자유에 다리는 아팠지만 탁 트인 한강공원은 나에게 두 번째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생각보다 나처럼 혼자 한강공원에 온 사람도 많았는데, 다들 거리 두기를 지키면서 지금 시국에 할 수 있는 나름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나 또한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하나사들고 벤치에 앉아서 노을이 지기만을 기다렸다.


매일 같이 뜨고 지는 해인데, 막상 기다리기 시작하니 10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앉아있자니 추운 날씨였고, 걷자니 다리가 아파왔다. 역시 무엇이든 간절하게 원하는 건 쉽게 얻을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추위와 지겨움을 버티고 나면 난 이쁜 노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뜨고 지는 노을이 아니라, 내가 간절히 원하는 노을을. 설령 이 노을이 이쁘지 않아도 나에게만은 이뻐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내 눈엔 이쁘다.

무슨 고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노을을 기다렸고 결국 볼 수 있었다. 현실에 치여 바쁘게 살아가기만 했었는데, 무언가를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건 정말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그렇게 내 눈에만 이뻐 보일지 모르는 노을까지 보고 난 뒤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찬바람을 계속 맞아서 그런지 잠도 몰려오고 다리도 아프고 여러모로 힘든 하루였다. 하지만 오늘 내가 본 풍경들, 내가 느낀 감정들은 다리가 낫고나서도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만 같다.


그저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행복을 말하는 나를 보면서 '난 참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쉽게 행복을 느끼는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나서, 마지막 세번째 행복을 만날 수 있었다. 2020년 12월 26일인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지만, 어쩌면 내겐 완벽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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