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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Sep 03. 2019

흘려보내기 연습

관계의 균열

 아이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띠링'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연락처에 없는 번호인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첫마디가 '선숙아, 미안해'로 시작하는 메시지.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챘다.



 언니 K는 결혼 직전까지 다닌 직장에서 만났다. 우리는 다른 팀이었지만, 민원인을 상대한다는 공통점으로 서로를 다독이며 끈끈해진 인연이었다. 학교 졸업 후, 5년 넘게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는 그녀. 매번 떨어지자 일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중이고, 부모님이 외동딸인 본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다. 마음이 여려서, 할 말을 못 하고 속으로 끙끙거리는 일이 많아 자꾸만 챙겨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사회에서 뒤늦게 만난 언니이지만, 평생 갈 인연이라 여기고 친동생처럼 살갑게 굴었다.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오고, 나는 다른 지역에 신혼집을 구하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결혼 날짜가 나오기까지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아는 사이, 매일 얼굴 보는 사이였던 우리의 카톡 대화창에 없어지지 않는 숫자가 뜨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내가 보낸 메시지마다 딸린 1이라는 표시, 혹시나 큰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했다. 전화를 걸어도 연결음만 들릴 뿐이었다. 언니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녀가 일부러 나를 피한다는 걸.

 '그럴 리 없어, 아니야'가 '맞는구나'로 변하면서 느낀 배신감과 그 씁쓸함에 유독 마음이 추웠던 해로 기억된다.

 축하를 받으며 끝낸 결혼식에도 물론 그녀는 없었다. 그래도 언니의 전화번호는 쉽사리 지우지 못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근근이 붙잡고 있던 번호를 지웠다. 가끔 그녀를 떠올리기도 하며 살아왔다.




 그러니까 결혼식을 앞두고 갑자기 연락을 끊었던 언니가, 내가 아이까지 낳아 키우고 있는 지금에서야 문자를 보내왔다는 말이다.

'선숙아 미안해'에 이어 언니 성격대로 조용함이 묻어나는 문자가 이어졌다.          

[나 결국 시험 또 떨어졌어.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 그러고 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더라.

계좌번호 제발 알려 줄래? 축의금 지금이라도 보내고 싶어]



 문자를 쳐다보다가, 청첩장을 건네는 일로 고민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일생의 큰 관문인 결혼식을 앞두고, '올까, 안 올까?' 많은 생각에 빠졌었다. 청첩장은 누구에게, 어디까지 돌릴지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언젠가 졸업 후 5년 만에 '나 결혼해, 청첩장 보낼게. 꼭 와야 해' 란 동기의 연락을 받았었다. 친하지 않던 관계의 결혼식을 가냐, 마냐, 축의금만 보내야 하나로 머리 아프게 고민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심지어 네이버 검색 창에 쳐본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결혼식의 참석 여부를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슬픈 나머지,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줄 이른바 내 사람들에게만 청첩장을 건넸다. 일생 한 부분의 새로운 시작을, 사심 없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길 단단한 인연들. 우르르 많이 와서 예식장을 꽉 채우지 않더라도, 그들의 응원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감사하니까 말이다.



 주말 내내 공부할 언니에게 조심스레 청첩장을 주며 이렇게 말했었다.

 "공부하는 것 힘들지? 그럴 때는 잠깐의 개인적인 스케줄도 부담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난 언니가 축하한다는 연락만 줘도 고마울 것 같아."

 사실 결혼식을 앞두고, 언니만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아끼는 마음이 그만큼 더 컸던 거다. 연락이 끊어졌다는 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다시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언니는 공부만 하는 본인과 결혼을 앞둔 내 모습을 비교하며 비참한 나머지 연락을 끊었다 했다. 계속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보니, 내가 떠올랐단다.

 어쩐지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급하게 정한 결혼 날짜에 한순간 예비 신부가 되어버린 나였다. 그런 날 지켜보는 언니는 왠지 낯설고 헛헛한 마음이었을 거다. 그렇다고 건강한 시간을 함께 보낸 관계를, 싹둑 잘라 정리를 했다는 건 가슴 한구석을 쓰리고 시리게 만든다.




 예전의 나였다면, 심하게 늦은 연락이지만 용서하고 다시 잘 지내보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인연이 끊기는 것에 대해 너무 서글펐고, 다시 이어 내 사람으로 만들고픈 일말의 희망이 있었기에.

 하지만 이번엔 의연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의 움직임이 달랐다. 그동안 나에게 오고 가는 사람들을 겪고, 아이의 엄마로도 지내며 조금씩 단단해진 탓일까.



 다음날 아침, 답문을 꾹꾹 눌렀다. 내가 따르고 아꼈던 언니라 더 슬프고 황당했노라고. [지금 계좌번호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언니 새롭게 시작하는 일 잘 되기를 바라. 우리 각자 열심히 살자]




 그녀를 흘려보냈다. 무언가를 먹어야만 할 것 같아 초콜릿을 우적우적 씹었다. 쌉싸름한 맛이 가득 채워져도 자꾸만 허기지는 기분이다.


 청첩장을 줄 만큼 당연히 내 사람이라 여긴 상대에게, 진심이 닿지 못하고 튕겨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불붙듯 타오른 관계가 순식간에 식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알아간다.

관계의 균열을 애써서 메우기보다, 갈라진 틈 사이로 가장 나답게 묵묵히 살아내기.

그걸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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