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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Nov 15. 2019

우리의 연애는 36.5도

10년의 연애 지겹지도 않니?

10년의 연애 지겹지도 않니?


 나의 연애에 대해 제일 많이 들어 본 질문이다. 오랜 친구나 새로운 인연이나, 하다못해 엄마까지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지겹지도 않니’의 상대방인 그와,  6년째 부부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 합이 16년. 우와 내가 생각해도 조금 미쳤다 싶다.

 우리는 ‘미치도록 사랑했다’보다 서로의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만큼 길고 긴 시간 동안 헤어졌다, 붙었다, 떠나고, 돌아오기를 겪으며 단단한 사랑이 자리 잡았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 동아리 친구 사이이다. 그를 처음 마주쳤을 때, ‘완전 내 스타일 아니다’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이상형은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사람이었는데, 그는 작고 까만 차돌 같았다.

 웃기면서도 화가 나는 사실은, 상대도 날 보고 똑같은 생각을 했단다. (작고 귀여운 여자가 이상형이었다고) 그는 이성에 관심 없이 운동장에서 축구만 내내 하던 아이였다.

 반면 나는 달랐다. 남녀합반이라 그런지 사귈 기회가 생겼고, 어설프게 연애 흉내를 내던 시절이었다. 대학생인 독서실 총무 오빠를 만나서 자칫하다가 공부를 망칠 뻔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에게 연애 상담을 했었다. 같이 사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면, 입을 꼭 닫았을 거다.

(찌질한 연애사를 모두 알고 있다는 점, 생각보다 위험하다)     



 스무 살, 우리 사이의 금기를 깨는 일이 일어났다. 그에게서 사귀자는 말이 나왔다. 죽이 잘 맞는 친구를 잃을 것 같아 두려웠다. 연애는 분명 끝이 있을 테고, 소중한 사람과 남남이 되느니 이 관계를 지키고 싶었다.

 내가 거절하자, 그는 한 달 내내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강단 있는 자식.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하지? 자꾸 보고 싶어.’ 친구에서 연인이 된, 우리의 모습을 조금씩 상상해보았다. 공통 관심사도 패션으로 잘 맞았고, 말도 잘 통했으니 재미있는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만나보자는 문자를 보냈다. 오늘부터 1일, 우리 사랑은 이런 미지근한 온기로 20대의 시작과 끝을 함께 보냈다.      




 십 년 동안, 서로 꼭 붙어 지냈던 건 아니었다. 그가 군대, 어학연수, 해외 교환 학생으로 가는 바람에 군데군데 공백이 있었다.

 분명 오래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내가 필요한 순간마다 옆자리는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어도, 우리의 만남은 너무 편하고 익숙했다. 서로 거리낌 없는 말투에 장난은 점점 심해졌다. 이게 친구로서의 의리인가? 사랑인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있다지만, 설레어 미치는 연애를 하고 싶었다.

 


 난 점점 관계에 소홀해졌다. 모든 것에 심드렁하고, 건조하게 반응했다. 매번 만나기로 한 시간에도 늦었다. 그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작은 것 하나에도 최선을 다했다. 늘 먼저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데이트 장소에 일찍 나와, 묵묵히 기다렸다. 세세하게 내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고 맞추었던 거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꾹꾹 눌렀던 그의 인내심이 터져 버렸다.

 그 후, 몇 번의 이별과 만남을 반복했다. 헤어졌다가 “내가 잘할게. 다시 사귀자”라고 말하는 쪽은 항상 나였다.      

 

끝이 없는 만남과 이별



 헤어지고 솔로가 되면, 이상하리만큼 새로운 이성이 내 곁에 나타났다. 묵묵히 받아 주고 맞춰주는 스타일과 반대인 나쁜 남자에게 쉽게 빠져버렸다. 내가 그렇게 원하던, ‘불타는 사랑’이라 착각했다.

상대방이 무례하거나, 진지하지 않아도 흥미롭고 긴장되는 만남에 자꾸 끌렸다.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포장하면서 마음은 무거워졌다.

 답답한 마음에, 용하다는 점집에 가자 “매달 한 명씩 남자가 들러붙지? 다 쓸데없어.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야!”라며 내게 호통쳤다. 놀래서 헤어진 그의 사주를 읊었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며 내가 나무라면 상대는 흙이니 꽉 잡으라 했다. 듣자마자 드는 이 안도감은 뭐지? 평소엔 잘 믿지도 않던 사주를 철석같이 믿고 싶어졌다.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따로 소개할 필요도 없으며, 다른 모습으로 포장하거나 어떠한 거짓도 필요 없는 사이.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연인의 포근함이 그리워졌다. 이별하고 나면, 꼭 뒷북을 치는 사람처럼 그가 더 소중해졌다. 나를 진심으로 대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우연히 침대에 누워서 영화《연애의 온도》를 보다가,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영화 속 사랑이 낯설지가 않았다. 두 주인공처럼, 보는 내내 마음이 미지근해 막막했다가 차갑게 식어 온몸이 서늘해졌다.

 직장동료 동희와 영은 3년 차 비밀연애 커플이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지만,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배려를 하다 지칠 대로 지쳐간다.

 기분 전환을 위해 간 놀이공원에서,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다시 만난 걸 상대가 후회할 것 같아서, 또 헤어짐이 반복될까 두려운 나머지 서로에게 다 맞춰준 그들이다.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인 현실에 실망하더라도, 잘해보려 애썼던 것. 감정의 금이 깊어져 지친 동희와 영은, 롤러코스터를 함께 타고 마지막 이별을 한다.      


 “우리의 연애는 달콤하지도 아름답지도 이벤트로 가득 차 있지도 않았어요. 지루하고 평범하고 아무 특별할 것 없는 그저 보통의 연애였죠.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진심이었어요. 진짜 사랑을 했고 이건 내 인생에서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가장 영화 같은 일 일거예요."
          <연애의 온도>주인공 영의 대사

  

  그 후, 시간이 지나 영화관에서 재회하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여운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과연 지독한 헤어짐을 반복하던 동희와 영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똑같은 문제로 골치 아파질 수 있으니 시도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조금 달라진 것 같은 서로의 모습이 낯섦과 동시에 설렐 수도 있을 거다. 두려움이 더 큰 나머지 영영 상대를 놓을 수도 있고, 잊지 못해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보기도 하고 말이다.



 똑같은 연애일 걸 알면서도, 내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여행을 떠나 펜션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놀기도 하고, 익숙한 서로의 집에서 과자를 씹으며 영화를 보기도 했다. 둘이 잘 먹는 짬뽕이나 순댓국을 먹고, 변함없는 길을 걸으며 집에 데려다주는 데이트를 했다.

 말다툼 중, 상대방의 표정에 누군가가 먼저 웃음이 터져 흐지부지 끝나는 법칙도 여전했다.

 대신 서로에게 전에는 없던 묘한 기류가 있었다. ‘상대방을 건드리지 말 것’ 같은 암묵적 약속이랄까.     그는 내가 약속에 늦는 것을 싫어했다. 나는 술자리를 하다가 전화를 걸어 지인들을 다 바꿔주는 그의 술버릇이 싫었다.

 서로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것에 예민한지 너무나 잘 알기에 조심했다. 때론 눈치도 보고 말이다. 이번에 헤어지면 이제는 영영 끝이라는 생각이었던 거다.



 서른을 앞두고 ‘우리 언제 결혼해?’란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회사원인 나와 학생인 그의 현실로는 결혼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먼저 입 밖으로 꺼내기엔 비참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오래 만난 연인이라 해도, 꼭 결혼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서로의 인생이 얽히고설켜, 평범한 일상이 된 만큼 잃기가 두려웠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도, 긴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자신도 없었다.



"결혼 안 할 거면 미리 말해. 빨리 다른 사람 만나게"

 회사에 갓 입사한 사람에게 초조한 마음을 터트렸다. 아직 결혼 소식 없냐는, 이쁘고 좋은 시절 같이 다 보내고 헤어지면 어쩌냐는 등등의 주변 이야기도 마음을 콕콕 쑤셔댔고. 이 사람이라면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사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서른 살, 2월의 토요일. 신혼여행 생각 뿐인 우리 둘


 서른 살, 2월의 토요일에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주례사를 들으며 온통 신혼여행 생각뿐인 머릿속, 장난치는 모습도, 애주가, 힙합을 즐겨 듣는 취향까지 서로에게 스며들어 닮은 나와 이 남자.

 아직도 아이가 잠들기만 했다 하면, 둘이 놀 궁리로 바빠진다. 선택하는 영화마다 실패작, 계속 뭘 볼까 고르다 갑자기 깬 아이 때문에 안방으로 끌려가기도 한다.

 고칼로리 안주를 만들어 먹고 사이좋게 살도 같이 찐다. 최근에는 저스트 댄스 게임(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중 하나로, 캐릭터가 추는 춤을 그대로 따라 하는 방식)을 틀고 불꽃 튀기는 춤 대결에 빠졌다. 주로 내가 지는 편이라, 이 악물고 진지하게 결투를 신청해본다.

 '어디로 놀러 가지?’란 주제로 우리의 눈은 같이 빛나고,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다가 너무 멀리 패스했다는 이유로 대판 싸우기도 한다.



 쿵쾅거리고 불타오르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 여겼다. 그래서 자꾸만 익숙한 관계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상대방의 소중함을 몰라보고 말이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쌓이고 쌓여, 서로의 인생을 단단하게 지키는 것. 그 사랑의 가치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한결같이 유치하고 덤덤한 우리의 연애 온도는 어떻게 변할까. 길고 긴 우리의 사랑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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