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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Nov 15. 2019

엄마가 된 지 5일째

'엄마'라는 또 다른 변화를 받아들일 나에게

 4월, 차가운 공기 위로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창문 너머로, 바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속삭임이 들려왔다.

 '뛰어내리면 어떨까?’ 내가 서 있는 곳은 7층, 산후조리원이었다.




 출산한 지 5일째, 잠을 두 시간도 채 못 잘 만큼 혼란과 우울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잠을 자려고만 하면 침대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가위에 눌렸다. 온몸이 불타는 것 같은 뜨거움에 깊은 잠도 이루지 못했다.

 무엇보다도‘따르르릉 따르르릉’한 시간마다 아기 수유 시간을 알리는 전화벨 소리란, 악몽 같았다. 당장 전화선을 찾아 뽑아버리고 싶었다. ‘분유 먹여 주세요. 저 잠 좀 잘게요’라고 소리치려 했다.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수유 시간이 곧 모성애였다. 모유의 양은 마치 선택을 받은 마냥 잘 나오고 안 나오고가 정해졌다. 내 경우는, 우유병 바닥을 얇은 습자지로 둘렀나 싶을 만큼 처참한 양이었다. 새벽에도 무조건 수유를 해야 하고, 모유의 양이 늘어야만 하는 엄마가 되었다. 잠을 자느라 건너뛴다면, 아기에 대한 사랑이 모자란 이기적인 부모가 되는 것 같았다.



 '모성애’란 자식에 대한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랑은 아기를 출산하자마자, 정말 본능적으로 아주 당연히 생기는 엄마의 자질인 줄로만 알았다. 안타깝게도, 난 달랐다.

 “나 자꾸 도망가고 싶어, 되돌리고 싶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뱉은 첫마디였다. 하루아침에 엄마가 되어 버린 책임감과 무거운 무게에 짓눌려, 모든 것이 엉망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당황스럽지만 침착하게 위로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오후에 친정엄마에게 “너무 힘들어. 앞으로가 두려워.”라고 말했다. 엄마는  "이제 꿀이(태명) 왕자님의 부모가 되었는데 마음 강하게 먹어야지!”라고 다그쳤다. 나약해지는 날 위해 정신 차리라는 뜻이었을 테지만, 서러웠다.

 ‘누구의 엄마가 된 지 고작 5일째란 말이야.’

 퇴근길에 족발을 사서 온 남편에게, 앞으로 자신 없다며 펑펑 울기도 했다. 여기 조리원 사람 중에, 나만 혼란의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아기를 방에 데려와 같이 있는 시간에, 무교이지만 속으로 기도했다. ‘울지 않게 해 주세요, 똥 안 싸게 해 주세요. 속싸개 안 풀리게 해 주세요.’ 단둘이 방에서 젖을 물리는 것도, 똥 기저귀를 가는 것도 두려운 초보 엄마였다.

 뱃속에서 나온 것이 맞나 믿기지 않았다. 작고 꼬물거리는 아기를 안는 것조차 하나의 숙제로 다가왔다. 베개를 들고, 말아 놓은 수건을 들고 수차례 안는 연습을 했다.

 모든 관심사는 모유 수유 자세, 시간, 방법 등등. 하루아침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엄마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아기 얼굴을 본 후, 조리원 방으로 들어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출산 전에는 배가 무거운 것 빼고는 밝고 생기가 돌았는데, 홀쭉한 배에 낯빛은 어두운 내가 서 있었다.

 "나는 이제 끝났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습관처럼 큰 사발에 담긴 미역국을 퍼먹고, 다시 아기를 보러 신생아실을 향해 걸어갔다.



 엄마라면, 강한 모성애로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모든 것을 아기에게 맞추는 게 당연한 듯, 볼 때마다 행복한 마음이 넘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어디에서든 부모가 되는 일은 축복이고, 아기는 우리에게 찾아온 천사라 여긴다.

 정작 엄마가 된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 엄마라면 따라오는 수식어들로 다그치며, 새로운 역할을 해내기만을 원했다.

‘아기에게 엄마는 우주’라는 말이 있다. 심장 소리 들으며 기뻐하고, 뱃속에서 발차기할 때마다 쓰다듬다가, 건강하게 만나게 된 고귀한 존재임은 틀림없다. 다만 그 존재의 우주가 되기엔, 나란 사람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버거웠다.     





 '모성애’가 갑자기 훅 튀어나오기 힘든 사람, 아기를 낳자마자 그 전 삶으로 훌쩍 도망가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다. 아이와 단둘이 있으면 떨리는 그런 사람, 나랑 희생이란 단어는 안 어울려 라는 생각을 하는, 나 같은 엄마. 분명 있을 것이다.

 


 스스로 다그치는 대신, 새 역할을 마주하기에 힘을 낼 수 있도록 위로를 했다면 어땠을까.

 다른 이보다 조금 느리고, 마음의 적응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그대로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

 이전의 자유롭고 당당했던 모습이 떠오를 때 '지금 제정신이니?’라는 비난보다, 처음 도전하는 역할에 대한 낯섦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말이다.

 그럼 아마 창문을 보며, 내 인생 처음으로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떠올리지 않았을 텐데. 송곳으로 마음을 콕콕 찌르는 것같이 아파 왔다.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본 엄마가 바라보는 창문은, 따뜻하고 밝아야 한다. 눈이 부셔서 찡그리게 되더라도, 창문 밖 세상조차 환하게 보일 만큼 내 마음이 빛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라는 또 다른 변화를 받아들일 나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도록, 끊임없이 자책과 위로를 반복해왔다. 알게 모르게 단단해진 마음이 한순간 물렁거릴 때가 있다. 그때마다 눈을 감고 조리원 창문을 떠올린다.

 오도카니 서 있는 내가 보인다. 혼란스러운 나에게 가만히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 줄 테다.

너 같은 엄마 많아.
 그리고 완벽한 엄마란 없어. 잘하고 있어.”


     이 이야기는 지금도 듣고 싶은 말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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