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선숙 Nov 14. 2019

거기 누구 없어요?

사람 만나기 대작전

 이사 온 지 3년, 돌이켜보면 지독한 외로움의 시간을 거쳤다. 그동안 우리가 가꾼 이 집은 정이 푹 들었고, 나를 아껴주는 언니도 세 명이나 생겼다.

 자연스레 언니들의 아이들이, 내 아이의 친구가 되었고 형부들은 남편의 술 형님으로 함께 한다.



 여기는 밤이면 주변이 캄캄한 어둠으로 깔리며 개구리 소리가 들리는 곳, 이름 모를 풀꽃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시골이다. 이사 와서 1년 동안 내내 집들이를 했었다.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뉘었다.

 “아, 나도 그릴에 고기 구워 먹으며 잔디에서 공 차보고 싶다.”

 이건 남편들 입장, 이 말을 들으면 우리 부부가 해주는 말이 있다. 고기는 남이 구워 주는 게 제일 맛있고, 무섭게 자라는 잡초 뽑다 보면 잔디를 밀어 버리고 싶을 거라는 경험담을 말이다.

 “난 여기서 절대 못 살아.”

 전원주택을 꿈꾸는 남편 생각의 싹을 잘라 버리는 아내들 발언이다. 다들 주위에 볼 것이라곤 산과 논인데 괜찮냐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낼 때였다.

 “있지. 친구를 만들고 싶어. 사람을 만나고 싶어!”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가만히 있다가 터진 내 말에, 일제히 시선이 남편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민망함에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한동안 백화점, 커피숍, 영화관, 병원이 가까이에 없어도 견딜 만했다. 아는 사람 없이, 혼자인 상황이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이와 마당에서 뛰어놀고주위 경치를 둘러보느라 바빴으니까.

 곧 엄마나 친한 친구들과의 전화 통화만으로, 종종 시내로 약속을 잡아 만나는 조리원 동생이나 문화센터 친구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퇴근한 남편을 잡고 떠들거나, 아이에게 말하는 내 입은 쉴 틈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쓸쓸한 이 마음은 뭘까?




 

 여름날, 문을 열고 나갔다가 적막하고 고요한 바깥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텁텁하고 무더운 공기보다 더 나를 답답하게 누른 건, 바로 ‘이 동네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라는 사실이었다. 집집에 분명 젊은 부부들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다들 외출하기 위해 집 마당에서부터 차를 타고 내려갔고, 더운 낮에는 나오지 않았다.

 사람 소리 하나 없이, 커다란 우주에 나 혼자 떨어진 느낌 딱 그거였다. 일부러 아이 손을 잡고, 산책하듯이 주변을 돌았다. 마당에서 내내 땀 줄줄 흘리며 놀다가도 ‘어디 사람 안 지나가나?’란 생각에 살피기도 했다.


 

 안 되겠다. 이러다간 영원히 그 누구도 못 만날 것 같아. 누군가를 마주칠 수 있으니 그때를 놓치지 말자며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내가 당황스러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은, 운명이라 여겨왔다. 만날 사이라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단단해지리라 말이다. 억지로 관계를 이었더니 불붙듯 타다가 허무하게 사그라든다는 걸 깨닫기도 했었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와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안달이 난 상태인 거다. 시골로 이사를 왔고, 남편은 항상 늦게 퇴근하며, 아직 어린 아들이 있다면 마음이 급해진다. “거기 누구 없어요?”를 외치고 싶게 만드니까.




 밖에 나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본다. 이리저리 헤집는 손가락 사이로 구깃구깃 느껴지는 종이의 감촉. 얇고 작은 분홍색 포스트잇이다. 어떤 글이 쓰여 있는지,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걸. 최대한 힘을 줘서 반듯하게 쓴 내 글씨가 담겨 있음을 말이다.

안녕하세요 ^^ xx호예요. 제 번호는 010-xxxx-xxxx랍니다♡


 내용이라고는 나를 알리는 원초적인 정보에 불과했지만, 포스트잇을 5장씩 버리며 썼다. (웃음표시를 할까 말까, 하트를 넣나 빼나, 말투가 유치하나 등등 나름 치밀했다)

 그렇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나온, 사람 만나기 대작전의 계획이 이거였다. 핸드폰을 내밀기에는 '번호 따기’ 같아 망설여지고, 그냥 인사만 나누고 보내면 그대로 끝일지도 모른다. 폰 번호! 번호가 핵심이야. 누군가가 보인다면 쪼르르 달려가 번호를 뿌릴 기세였다.

 이런 적극적인 자세, 내 모습이 낯설 정도였다. 그만큼 새로운 인연이 간절했던 거다.      



 창문을 바라보니 반대편 위쪽 집에서 할머님과 아이 두 명이 내려왔다. 내복 차림인 아들에게 얼른 겉옷만 입혀 뛰어나갔다.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이 있었다. ‘집순이’인 며느리가 나보다 3살이 많은 언니 E라는 사실, 첫째 손주가 내 아이와 동갑이고, 어린이집을 내년에 보낼 계획이라는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주머니 속 포스트잇을 만지작거리다, 할머님께 수줍게 내밀었다. 며느리께 전해 달라고 말씀을 드리니, “우리 며느리는 밖에 잘 안 나와.”라며 씩 웃으셨다.

 


 집에 들어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번호를 적은 종이를 전했다니 막 웃다가도 측은하단다.

 당장 우리 옆집으로 이사 가서 낮이고 밤이고 불러내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잠시 상상했다. ‘육아 스트레스고 뭐고 다 무찔러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렇게만 된다면 신나는 인생 펼쳐지는 거지!’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살펴보았다. 혹시 문자가 와 있을 수도 있잖아? 없네, 없어.

 


 그날 밤, 드디어 모르는 번호로부터 어색함이 묻어나는 문자 하나가 왔다. 설레었다. 이게 뭐라고 떨리나 싶지만, 길을 가다 느낌이 온 이성에게 번호를 묻는 기분이랄까. 지금 상대는 밖에 잘 나오지 않는, 아들 둘의 엄마지만 심쿵했다. 냉큼 보낸 답문엔, 기다렸다는 듯 또 답이 오고를 반복하며 밤이라도 지새울 기세였다. 서서히 편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전혀 몰랐던 사람과 첫 시작이란, 새삼 떨린다. 결혼 후, 우연히 친해진 네 명의 그녀들이 떠올랐다.     같은 아파트에서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한 동생, 조리원에서 마음이 맞는 또 한 명을 만났다. 서로 장문의 문자를 주고받고, 엄청난 배낭을 짊어지고 아이를 아기 띠에 매달아 열정적으로 뭉쳤다. 문화센터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언제나 씩씩한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각각 회사에 복귀해서, 이사를 와서, 아이가 자꾸 아파서 등등으로 연락은 뜸해졌고 열정은 조용히 사그라들더라.

 그럴수록 오래된 관계에만 기대려 했다. 순식간에 친해져, 어디서 이렇게 나와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났나 놀랍다가도 ‘결국 남는 건 옛 친구뿐이네’ 싶어 체념했었다.


 

 나를 “쑥이야”라고 항상 다정하게 불러주는 언니 E를 보면, 누군가를 알아가는 설렘이 다시 시작된다. 만약 내가 언니의 시어머니께 부탁드리며 포스트잇을 건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서로 마주치면 인사 정도 하는 동네 주민으로 남았을 거다. 그녀가 말하기를, 사실은 처음부터 나를 봐왔고 말을 걸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단다. 아이고 순수한 우리 언니야.

 


 집순이인 그녀를 끌어, 같이 산책을 하고 마트를 갔다. 무공해 인간이라고 부를 만큼, 같이 있으면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다.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별 것 아닌 행동에도 칭찬해주고, 역시 쑥이라며 치켜세워 준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 느껴지게 말이다.

 내가 열 받아서 누구 욕을 하면, “그 사람도 무슨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라며 김이 확 빠지게 만든다. 대신 억울한 마음은 확실히 풀어준다. 믹스 2개를 넣은 시원하고 진한 커피와 언니표 매운 라면을 끓여 자꾸 먹어 보란다. 먹다 보면 기분이 가벼워져, 조잘거리는 나로 돌아오게 하는 법을 아는 사람. 친언니 같아서 마구 안아주고 싶다.


 

 탄력을 받아 언니 두 명을 내 인생에 더 끌어들였다. 나를 부르는 방법도 “썬”이나 “슈가”로 제각각인 귀여운 인연들. 모두가 외로웠던 시간, 나처럼 이 동네엔 왜 이렇게 사람이 없나 싶은 마음에 어슬렁거렸을 것이다.

 나더러 한 줄기 빛 같다 했다. 그렇다면 나는 꺼질 듯 말 듯 한 빛이었을 거다. 그녀들이 환하게 밝혀주었으니까.




 우리는 사람 때문에 힘을 내며 살아가고, 사람 때문에 치이고 상처를 받는다.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할 때도, 누군가가 살 부대끼며 바짝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순간도 있을 거다.

 일부러 관계를 만들더라도, 억지가 아닌 자연스레 파고드는 인연일지도 모를 일이다.

 수줍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힘껏 꽉 잡아 준 언니들. 말할 사람이 없어 입을 다물어야만 했던 공허한 하루를, 따뜻한 온기로 채워주어서 진심으로 고맙다.                

이전 03화 어떤 날씨를 좋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