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빗소리가 툭툭 스며든다
"엄마 비 와요!"
나보다 일찍 일어난 아이가, 커튼을 걷고 날씨를 알렸다. 어쩐지, 푹신한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연신 비비며 나오기 싫더라니. 따뜻한 우유와 토스트를 같이 먹고, 유치원 가방을 챙겼다. 아이는 코끼리 그림이 그려진, 회색 장화를 신고 현관에서 기다렸다. 우비를 찾아 입으라며 건네고, 나 또한 우비의 똑딱이 단추를 급하게 잠그며 나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 비릿한 공기가 느껴졌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납작한 돌계단을 밟아 마당을 건넜다. 비에 젖은 잔디 냄새가 그득하다. 아들도 풀 냄새가 좋단다. 물 웅덩이를 밟아 발이 젖었다. 그런 나더러
"엄마, 장화 없어? 내가 사줄게!" 라며 눈썹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아이에게서 더 싱그러운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탄 유치원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뒤돌아 집으로 오는 길, 타닥타닥, 빗소리가 더 커졌다.
비 오는 날에는 꼼짝도 하기 싫어하던 나였다. 옷에 물이 튀어 눅눅한 느낌이 싫었다. 살에 쩍쩍 달라붙는 건 더 싫었다.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 우산도 매번 잊고 어디엔가 두고 왔다. 심지어 약속이 있는 날에 비가 오면, 만남을 취소할 때도 있을 정도였다. "갑자기 비가 온다. 우리 다음에 만자." 란 황당한 이유로 말이다.
널어놓은 빨래에 비가 흠뻑 내려, 다시 빨아야 하는 찝찝한 기분. 그 축축 늘어지는 우울함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날씨에 따라 기분이 쉽게 변했던 것 같다. 햇빛 쨍한 날은 눈 뜨자마자부터 힘이 넘치도록 활기찼고, 이렇게 종일 비가 내리면 마음이 가라앉아 도통 헤어날 줄을 몰랐으니 말이다. 그럴 땐, 무거운 감정을 빨리 털어내 버리고 싶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주위 사람들의 반응도 그러했다. 말이 없고, 표정이 어두우면 하나같이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우울해 보여?" 라며 말을 걸었다. 나다운 모습을 위해, 돌아오기 위해 서둘러 처져있던 기분을 한껏 올렸었다.
언젠가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딱 꼬집어 보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게 된 작년부터였다.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고 나서야, 마음이 심하게 망가져 있음을 깨달았다. 새벽에 숨죽여 우는 그 순간조차도, 애가 잘 자고 있는지 신경 쓰느라 감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테라스에서 빨래를 널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빨래를 왜 했나 싶을 찰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딱히 슬플 것도 없던 평범한 낮, 지금 혼자라는 홀가분한 해방감에 비가 더해져 쌓인 마음이 툭 열린 것이다.
시원하게 울었다. 그만큼 느끼는 모든 것을 꽁꽁 싸맨 채 담고만 있었을 테니까.
이제는 마음이 노글노글하게 풀어지는 날. 얽히고 복잡한 생각도 잠시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날. 우울한 기분도, 탁탁 빗소리도, 눅눅한 느낌도 슬그머니 편하게 다가온다. 오히려 즐기게 되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젖은 발을 수건에 비비고, 2층으로 올라갔다.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열면, 지금부터 온전히 내 세상이다. 햇볕을 좋아한다기에 여기로 자리를 옮긴, 덩치 큰 식물 '드라코'가 잎을 축 늘어트리고 있다. 그 옆 소파로 몸을 날려 누웠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써늘하고 축축한 습기마저도 좋다. 유리 천장으로 미끄러지는 빗줄기와 함께 음악이 빠질 수 없지.
내가 잘 모르는 것처럼-백예린
비도 오고 그래서-헤이즈
Rain - 김예림
저음의 섬세한 목소리가 딱 어울려. 동그란 스피커의 울림이 테라스 전체를 가득 채운다.
음악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오로지 빗소리에 집중하던 순간이었다. 내리는 비보다 더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떠올랐다. 아하, 잊고 있었다. 나의 로맨스!
짧은 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여름날, 남자 친구를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있었다. 서로의 젖은 옷을 털어주고, 머리카락과 얼굴을 닦아주다가 첫 입맞춤을 했다.
바깥은 땅에 내리꽂는 거센 빗줄기와 지나가는 차 소리가 섞여 시끄러웠다. 둘만 있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공간에서, 내 심장소리가 쾅쾅 울려 퍼져 상대방에게 들리면 어쩌지.
비에 젖은 옷 때문인지 더 떨리고 춥고, 얼굴은 뜨겁고 촉촉해졌다. 이어서 우리에게 찾아온 잠깐의 정적 속에 빗소리는 더 세차게 들려왔다.
어쩌다 이렇게 백 년 묵은 설레는 감정도 꺼낼 수 있는 신기한 날이다. (어제 뭘 먹었는지도 금방 잊어버리는데 말이다.)
프러포즈받은 날도, 창문에는 빗방울이 맺혀 미끄러지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습기 때문에 꼬불거리고 긴 원피스가 다리를 휘감아도 아무 상관없었다. 눈 앞에서 찬연히 빛나는 아주 작은 반지 때문이었을 거다.
종이박스 하나를 같이 쓰고 빗속을 달렸던, 단짝 친구와 내 모습도 아른거렸다. 흠뻑 젖은 채로 깔깔거리면서 전철을 탔었다. 친구와 앞칸을 향해 걸어가며 쉴 새 없이 웃고 떠들었다. 발걸음마다 물이 뚝뚝 떨어져 우리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이제는 '나다운' 기분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밝고 촐랑거리는 내가 있고, 혼자 움츠려 어두워지는 나도 있다.
날씨에 따라 감정이 변한다면, 거기에 비까지 내려준다면 순간의 감정을 흠뻑 느끼려 한다. 촉촉해지는 마음, 갑자기 떠오른 로맨스도, 먼저 보내서 만날 수 없는 친구가 생각나 슬픔의 끝을 달리더라도.
마음 구석구석까지 하염없이 빗소리가 툭툭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