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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Nov 14. 2019

인생은 돌고 돌아

너 생각보다 용감해. 그러니 하고 싶은 것 다 해봐

 책 출간 기획서에 '글 쓰는 것이 좋아서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를 쓰는 순간, 떠올랐다. 잠시 넣어 두었던 의욕 과다 시절, 일명 방황의 시대. 누구에게 말하자면 낯뜨겁지만, 호기심과 열정 하나로 도전하고 또 쉽게 식어 새로운 목표를 찾아 헤매던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시험이 끝나는 날을 기다렸었다. 동네 책방에서 미리 봐 두었던 책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종이 냄새를 좋아했다. 골라 놓은 책을 거실에 엎드려서 읽는 것이 나의 행복이었다. 장래희망이 '시인'이었던 아이, 세월이 흘러 대학교 동아리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시를 쓰게 되었다.


이런 모범적인 어린이라니, 낯설다.


 단순히 글 쓰는 것이 좋아서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시 쓰는 동아리 '뿌리’에서, 어설픈 시는 말 그대로 뿌리가 뽑히도록 탈탈 털렸다. 내가 쓴 글이 공개될 때면 어찌나 떨리던지. 주제는 왜 이렇게 심오했을까. 자아 찾기, 고독, 죽음과 같은 지금 생각해도 머리 아플 내용으로 말이다. 선배들은 등단을 꿈꾸며 글을 썼고, 난 고칠 것 덩어리가 된 시를 보며 한숨을 쉬곤 했었다.

 친구와 수업 끝나고 눈만 마주치면, 잔디밭에 앉아 새우깡을 씹으며 맥주를 마셔댔다.

 “우리 졸업은 할 수 있을까?”

 “졸업하고 글 쓰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서른 살이 넘으면 어떤 모습일까?”

  알 수 없는 미래를 늘 상상했다. 물음표가 커질수록 씁쓸함과 설렘도 더해갔다.



 

 졸업 후, 영등포역 근처 작은 신문사에 다녔다. 수습 3개월 동안 월급 80만 원, 수습이 끝나도 가벼운 월급에 식대 지원 불가, 사무실 청소까지 내 할 일이나 그마저 감사했다. 글 쓰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항상 사무실은 취재 간 선배들로 비어 있었다. 모두가 모인 날 근처 부대찌개 집에서 한 회식이 기억난다. “기자는 배고픈 직업이야. 네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란 물음에 잔뜩 긴장한 채 무조건 버티겠다 했다.

 결과적으로는 못 버텼다. 나가떨어져 버렸다.

 매일 하는 야근에도 정말 배가 고팠지만, 날 힘들게 했던 건 기사에 대한 배고픔이었다.

 


 어느 날부터, 내 책상에는 무슨 글씨인지 알 수 없이 갈겨쓴 정체 모를 메모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취재 내용이 담긴 메모였다.

 거기서 제목 뽑고 관련 정보 찾고 글을 쓰면, 결국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기사가 올라가기 일쑤였다. 견디다가 열정이 빠진 빈 껍데기 상태로, 막차 전철에 올라 어두운 밤을 건넜다. 그날 올라온 기사들은 넘치고도 흘렀지만, 내 글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신문사에서 나와, 열린 방황의 시대. 나의 도전 정신 하나는 인정한다. 국문학과 전공인데 왜 비서를 지원하냐는 면접관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문학이 결국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수단이듯이, 비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라 답했다.

 예상치 못한 합격 전화를 받고, 으리으리한 회사 건물로 출근했다. 예쁘게 차려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채 커피를 마시며 걷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부사장님 비서를 하면서 대단한 착각임을 깨달았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속에, 상황 파악도 빨라야 하는 것은 물론 계획적이고 꼼꼼해야 했다. 면접에서는 똑 부러지고 당차 보일 수 있었으나, 원래 덤벙거리고 살짝 어설픈 사람인 걸. 실수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릴수록, 자꾸 꼬여만 갔다.

 잔뜩 기죽은 모습으로 출퇴근하다가, 당황스럽게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었다.

 "이 옷 어디서 샀어요?”

  저렴하지만 세련되고 단정한 옷. 구입처를 물어보는 또래 여자들의 관심이, 비서라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나에게 새로운 탈출구로 다가왔다.



 2년 후, 매일 새벽 동대문에 출퇴근했다. 신상 판매자에게 첫 번째 관문이란, 무신경하고 불친절한 거래처를 뚫는 것이었다. 아이라인을 한껏 치켜올려 그리고, 당당한 척해도 쫄보 기질은 다 드러났다.

 측은지심 작전으로 밀고 나갔다. 비타민 음료수에  '코코송로즈(당시 쇼핑몰 이름)’를 써서 붙이고 진행하고 싶은 옷 거래처마다 돌렸다. 눈을 맞추고 괜히 어색한 말도 꺼내면서 항상 웃었는데, 드디어 진심이 통했다. 나중엔 신상 옷이 나오면 무료로 샘플 대여까지 해주는 곳까지 생겼다.


 


 옷이 담긴 거대한 비닐봉지를 악착같이 쥐고 누볐다. 쇼핑몰 사장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원래부터 내 옷인 것처럼, 자연스레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새벽에 가서 새 상품을 고르고, 사진 찍어 올리고, 고객 응대에 택배 발송까지 그야말로 멀티였다. 바쁨을 신나게 즐겼다.

 단정하고 하늘하늘한 옷 사이로, 잘 팔리는 레오파드 무늬나 클럽에 입고 가야 할 법한 스타일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중심을 잡지 못 하고 흔들렸다. 오히려 매출은 자꾸만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어른들은 나더러 “그래서 연 매출이 얼마씩 나오니?”라고 물었다. 답답했다. 친구들은 “넌 좋겠다. 좋아하는 옷도 실컷 입잖아.”라며 부러워했다. 한숨이 나왔다. 급기야 하루에 보낼 택배 숫자가 3이 찍힌 날 그리고 주문이 없는 날까지, 한마디로 망한 쇼핑몰 주인이 되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움직이는 사람들의 열정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런 세계가 있구나 싶을 만큼 열기로 가득 찬, 새벽 시장의 내음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그 아무나 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맞음을 인정하고 말았다.




 할 일이 뚝 끊겼다. 어디로 가야 할까. 20대의 끝자락에, 막막한 벽 하나가 가로막은 느낌이었다. 언제 할지 모르는 결혼자금이라고 모아둔 돈도, 쇼핑몰을 하며 다 까먹은 상태였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직업상담사’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다. 일 대 일로 대화하기를 즐겨하니, 부딪혀 보자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 큰일 난다는 마음으로 독하게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1차 필기, 2차 실기 연달아 붙었다.

 


 고용센터 취업지원팀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했다. 일자리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 꼭 쥐고 있던 사탕을 수줍게 내미는 어르신도 있었다.

 반면 살다가 이런 말을 들을 일이 있을까 싶을 욕도 배부르게 먹었다. 어떤 날은 다짜고짜 “너 이름 뭐야? 찾아가서 염산 뿌리게.”라는 민원인 전화를 받고 화장실에서 펑펑 울기도 했었다.

 이런 일은 늘 있는 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을 상대하며 모두가 얼굴이 노래지는 곳이었다. 재취업을 위해 진심을 담아 노력하는 이와 “더러운 세상”을 외치며 분노를 퍼붓는 이도 함께 공존하는 곳이었다.     

 



  

 결혼과 육아를 거쳐 꼭 붙잡은 건 책과 글이다.

 누군가가 계획한 대로, 좋아했던 것 그대로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다면 노력과 독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실제로 같이 시를 쓰던 대학 동기는, 끊임없이 원고를 출판사에 돌려 책이 나오는 꿈을 이루었으니까.

 그렇게 한 길만 걸어온 사람도 있고 나와 같이 왕성한 호기심에, 열정에 자꾸 어디론가 흘러 다니다 돌아온 사람도 있다.

 늦게 도착했지만, 시행착오 겪으며 천천히 돌아온 길은 나를 더 유연하고도 단단하게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덕분에 이렇게 쓸 이야기도 많으니 말이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학교 잔디밭에서 맥주를 마시던 나에게 다가가 이렇게 속삭이고 싶다.

 너 생각보다 용감해. 그러니 하고 싶은 것 다 해봐.

결혼은 서른, 상대는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사람.  

진짜 놀라운 사실은 한 아이의 엄마야. 에너지 넘치는 아들! 참, 돌고 돌아 글은 계속 쓰게 될 거야.


 나의 열정 인생은 다시 출발 대기 중, 이렇게 정신 차려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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