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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Sep 10. 2024

아직도 여름이라니.

여름은 추억과 함께  오고 간다. 


여름을 좋아한다. 나풀나풀 가벼운 원피스를 입거나 보드라운 실크나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기분 좋은 재질의 옷을 입고 걷다가 만난 한 줌의 바람이 그렇게 반가웠다.  여름의 옷은 잦은 세탁에도 본성을 유지하는 재질이 중요하므로 아이들이 입는 면 티셔츠도 살펴보고 질 좋은 것으로 구매한다. 잘 마를 수 있도록 허릿단이 두껍지 않은 옷이 좋다. 장마철에 돌리는 건조기는 사이즈를 줄게 하므로 최대한 마른 상태에서 먼지터는 용도로 살짝만 돌려준다. 방문마다 계피를 설렁설렁 꿰어 묶어 매달아 놓고 이제 모기가 십리밖에서도 냄새를 맡고 안 오겠노라고 혼자 안심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디테일한 사소함이 재미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니는 세련된 모기는 허락도 맡지 않고 집까지 따라 들어와 아들의 다리에 올록볼록 모양을 내어 놓았다. 퉁퉁 부어오르는 어린 아들을 골라서 공격하는 모기의 파렴치함에, 아이를 키우고부터 여름이 달갑지 않았지만 물놀이를 짓는 아이의 청량한 웃음이 모든 것을 무장해제시켰다. 여름은 아이의 즐거움이고 아이의 즐거움은 나의 기쁨이 되고, 아이의 웃음은 나를 웃게 하고 내가 웃으면 아이도 덩달아 웃는다. 


아이들이 유치원 때부터 샤워할 때 속옷은 매일 스스로 씻는 것으로 습관을 들였다. 고사리손으로 물을 묻히고 비누칠을 하여 제대로 헹구지도 못하고 샤워부스 문고리에 걸어놓은 모양새가 귀엽기만 했던 것도 추억이 되었다. 이제는 샤워를 하며 야무지게 손으로 뽀득뽀득 씻어서 샤워기옆의 고리에 가지런히 걸어놓는다. 그러면 맨 마지막에 샤워를 하는 내가 마무리를 하는 시스템이다. 덜 씻긴 날이 물론 수없이 많았으나 습관은 천성을 이긴다고, 들이기 마련이다. 양말은 뒤집어 벗으면 세탁을 안 한다. 잔소리도 필요가 없다. 다시 뒤집어 놓으면 된다. 찡그린 얼굴로 손끝을 살짝만 닿게 잡고 양말을 뒤집는 모양새가 가당찮다. 더러워진 양말을 다시 만지기 싫다면, 뒤집어 벗지 않으면 된다고 우리 집 중학생 딸아이에게 말해준다. (남편은 결혼 후 한 번도 양말을 뒤집어 놓은 적이 없다. 신통하다고 생각했으나 반전으로 붕어빵 사춘기 딸아이의 뒤집어진 양말이 끝도 없이 출몰되기 시작하였다. 방심하면 안 된다. 재미있는 인생! ) 

 


오래 머무르는 해 덕분에 하루를 듬뿍 담는 느낌이 좋은 여름.  채도가 높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으면 쨍한 햇살만큼 명랑해지는 기분도 좋았다. 맑은 날씨에 생기 있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잔잔했던 내면이 물결을 이루며 덩달아 리드미컬해졌다. 여름의 상징인 냉면이나 빙수 같은 차가운 음식을 즐기지 않아도 아무렴 어때. 초록의 여름을 사모했다. 유일하게 즐기던 나의 여름음식은 예전엔 엄마가 해주던 장어덮밥과 오이냉국, 지금은 내가 제일 잘하는 가지덮밥.  


여름의 가지를 좋아한다. 보라색의 가지는 건강에도 좋고 요리도 쉬우며 맛은 일품이다. 나의 가지사랑 덕분에 우리 집 아이들은 가지튀김을 탕수육만큼이나 잘 먹고 가지와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덮밥도 한 그릇 뚝딱이다. 나의 가지요리법은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간단한 5분 컷을 소개하자면, 


1. 가지를 숭숭 어슷하게 삼각형 모양으로 썬다. 모양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부담 없이. 

2. 올리브유에 볶는다. 

3. 볶던 팬의 중간에 간장을 한두 스푼 넣어 불맛을 낸다. 

4. 물과 올리고당을 조금 넣고 조린다. 

5. 깨를 뿌려서 밥 위에 올린다. 계란 프라이를 해서 포갠다. 

6. 맛있게 먹는다. 


믿음직스럽고 간단한 나만의 계절 레시피들이 차곡히 쌓이면 지난했던 계절의 끝이 아쉬워진다. 





유년시절엔 수박을 먹을 수 있어서 여름이 좋았다. 수박씨를 씹어 먹다가 유치를 몇 개나 뺐다. 동생보다 더 빨리 많이 먹기 위한 나만의 전략이었으나... 이윽고 동생은 수박씨를 꼴딱꼴딱 삼키기 시작했으므로, 졌다. 분하다. 수박씨를 가열차게 씹다가 이가 빠져 그마저도 먹기 힘들고 억울할 때도 여름이 좋았다. 함께 깔깔 웃으며 입가에 수박물을 물들이던 순간이 그렇게도 달디달았다. 


알약 하나를 삼키려면 물 다섯 컵을 마시고도 실패하여 결국은 엄마가 가루를 내어 숟가락에 물과 함께 개어 줘야 했던 손 많이 가는 아이였음을 어른이 되고도 한참뒤에야(나의 아이가 유년기가 되고서야) 자각했다. 

나의 아이를 이해하려 하니 비로소 나의 엄마가 이해되었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달라졌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곳에서는 팔에 소름이 오소소 올라오고,  이내 두통이 심해져서 꼭 가디건을 챙겨 다니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 나에게 여름이란 품이 많이 드는 여름방학이 되었고, 가을은 개학과 추석의 시작이 되었다. 삼시 세 끼를 해 먹이고 함께 도서관을 다니며  부지런히 책을 탐독하던, 시간을 비켜나서 머물렀던 세상이 지나간다. 짧게 두 번 여행을 다녀왔고 아이들의 건강검진과 접종, 치과진료를 완료했다. 둘째 아이는 급성장으로 누나의 키를  앞질렀고, 여파로 시력이 나빠졌다. 안경을 쓰고 2학기를 맞이하게 된 아이에겐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일 것이다. 


새벽에는 창문을 닫고 아이들의 이불을 여며주니, 어느덧 가을의 초입인 듯한 데 한낮은 아직도 여름이다. 

쨍한 햇살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아이들은 다시 학교를 간다. 무더웠던 여름보다 가을의 늦잠이 더 달콤한데 일찍 일어나야 하다니. 한 녀석은 억울한 표정으로 몸을 베베꼬며 일어나고,  한 녀석은 새벽부터 홀로 일어나 이미 꽃단장을 끝마치고 책을 읽는다. 


유독 손이 많이 가는 아이가 있고 너른 품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 멀리서 지켜봐 주는 게 좋은 나이가 있고  가까이서 토닥여 주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의 우리는 조금 거리를 두고 존중하며,  다정하고 너른 품이 필요한 시기이다. 사춘기 아이에게도, 15년 차 부부에게도, 그리고 오랜 친구인 나 자신에게도 연연하지 않고 인정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을의 단풍잎에 틀린 색이 있던가. 똑같이 물들지 않았어도 모두 나의 친애하는 가을임을 잊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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