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 싶니?
나이키 운동화 안 신어 못 뛰는게 아니다.
그거 안 신으면 '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무거워서 발이 안 떨어진다. 그 마음만 벗어 버린다면 삼선 슬리퍼든 실내화든 신고서도 얼마든지 신나게 즐겁게 심지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다. '나이' 먹어 '키'큰 어른이 되신 수험생들은 모두 해당이다.
공부도 꼭같다. 정말이지 똑같다. 학원 안 다녀서, 과외 안 받아서 못하는 공부가 아니다. 성적 좀 덜 받는다고 세상 달라지는 건 하나 없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미사어구는 현실에 없는 허상이다. 이상이다. 경쟁(竟爭)이란 자체가 '다투고 또 다툰다'는 말인데 엉뚱한 수식을 갖다 붙였다.
동료를 경쟁자로 만든다. 서로를 믿지 못한다. '너 죽고 나 살기'라는 제로섬 게임으로 설계된 게 입시라는 체계다. 죽자 살자 해서 거기서 살아 남아 봐야 '선발된 삯꾼'에 불과하다는 것이 본질이다. 진짜 경쟁 상대는 누가 아닌 자신 뿐이다. 근본적으로 혼자서 해야만 하는 게 공부다.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힘이 생긴다. 일제치하 식민 36년 동안 한반도 학교 교육이란, 철저한 2등 국민을 양산하는 과정이었다. 1945년 여름, 에놀라 게이(B29 폭격기)가 리틀보이(원자폭탄)를 히로시마에 떨구었던 비극 덕분에 되찾은 주권 국가의 위상이었지만 교육은 되찾지 못했다.
명칭만 서울대학으로 바뀐, 경성제국대학 아닌가. 거기를 못들어 가서 광복 후 지금까지 수십년 간 난리북새통을 치루고 있다. 식민 시절에는 출세를 보장하는 교육기관의 성격(식민 국민의 입장에서)이 확고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아니다. 기득권의 관성이 기득권이란 팽이를 계속 돌리고 있을 뿐이다. 입시경쟁이 바로 그런 것이다.
게임 규칙을 만드는 사람들과 게임해서는 이길 수 없다. '공정과 상식'은 그 판을 박차고 나오는 실천에서 나온다. '깨끗한 오염수'나 '검은색 백설기'로 부르는 것이나 다름 없는 '선의의 경쟁'이란 말만 외쳐선 이루지 못한다.
모두 뛰는 운동장으로 나오라. 나이키 안 신어도 충분하다.@
#ymedulab와이랩 #공부를왜하는데 #프로에게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