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가 열어주는 새로운 세상
그날은 비바가 우리 집에 온 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던 날이었다. 우리는 집 발코니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공원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씩 비바를 안고 나가서 풀밭 위에 내려놓곤 했었다. 내가 몇 발짝 내딛으면 본능적으로 졸졸졸 따라오는 작은 강아지가 귀여웠고, 비바! 하고 외치면 (아직 자기 이름도 모르는 주제에)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내 쪽으로 뛰어 오는 것이 신기했다. 그날도 그렇게 둘이서 한참 놀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멀찌감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까만 푸들 닉스와 그의 보호자였다. 닉스의 목줄을 쥔 그녀가 외치듯 말했다.
"우리가 그쪽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아, 괜찮아요. 그런데 얘는 아직 예방접종이 덜 끝나서 강아지들끼리만 인사시키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수 미터의 거리를 두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가 먼저 말했다.
"사실, 당신의 존재를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며칠 전에 이 동네 사는 제 친구가 '동네에서 라고또 퍼피를 봤어!'라고 말해주었거든요. 우리 닉스는 이제 5개월인데, 사실 닉스를 데려오기 이전에 라고또와 푸들 사이에서 고민했었거든요. 그래서 동네에 라고또가 생겼다고 하니까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꽤 이야기가 풍부한 사람이어서 순식간에 자기 아이들 이야기(딸 둘 아들 하나가 있다고 했다), 자기 친구가 키우는 라고또 이야기, 라고또가 운동량이 많다는 이야기에 포기해야 했다는 이야기, 닉스를 데리고 퍼피 코스에 다녀온 이야기까지 쫙 들려주었다. 마침내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또 만나요" 하고 헤어졌을 땐 갑자기 시작돼 폭풍처럼 지나간 수다에 긴장이 확 풀리면서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스웨덴에 오고부터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투명인간처럼 살았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이 이야기가 "너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만나보고 싶었다"와 같은 말로 시작된 점은 반가운 동시에 낯설었다. 그동안 좌표상에 명확히 찍히지 않는 매우 불확실한 부유물로 존재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는데, 갑자기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지도 안에 시각적으로 업데이트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도망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강아지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그냥 이 사람이 느낌이 좋아서일까.
집에 돌아와 이 날의 만남과 대화에 대해 파트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퍼즐이 맞춰졌다. 우리가 한창 강아지를 기다리던 시기에 그 공원에서 까만 공처럼 굴러다니는(!) 퍼피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닉스였구나! 그때는 닉스가 소녀 두 명과 함께였다. 언니는 초등학교 저학년생 정도로 보였고 동생은 유치원생 같아 보였는데 강아지가 너무 예쁘다보니 우리도 모르게 스르르 그들 곁에 다가가서 "혹시 강아지 종류가 뭔지 물어봐도 돼요?" 하고 질문했었더랬다. 그랬더니 두 소녀 중 동생이 이 질문에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똘망똘망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고는, (수줍기는 했는지) 다음 순간 휙 몸을 돌려 언니와 강아지를 향해 뛰어갔었다.
"저희 강아지는 하프 푸들, 쿼터 비숑, 쿼터 코똥 드 툴레아예요."
앞으로 비바와 닉스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또한 나의 위치 좌표도 비바와 함께 선명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