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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로 Jul 03. 2021

바둑판의 화점에 맺힌 세상만사

10. 청춘의 씨줄과 날줄에서 만난부등표

오랜만에 내 인생의 동반자와 마주 보고 앉았다. 아내는 내 인생의 동반자이자 내 생에 최고의 선물이다. 가끔씩 거울을 보는 아내는 흰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을 보며 안타까워 하지만 내 눈에 비치는 50대 초반의 아내 모습은 예쁘기만 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시시각각 변하는 육체의 모습보다, 사람의 품위를 만들어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호수와 같아서 연꽃의 감정을 피우기도 하고, 촐싹거리는 물고기들 같은 감정들이 살아가도록 생명력을 제공해주는 곳이다.  

    

나는 접이식 바둑판을 꺼내어 흰 돌을 잡고, 아내는 검은 돌을 잡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짓는다. 바둑판의 크기가 가로 42cm x 세로 45cm이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도 나누고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의 놀이판이다. 우리는 서로의 승부욕을 자극하지 않아도 되는 오목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도 성에 안차면 알까기를 하면 시간이 적당하다. 

    

오목은 바둑판에 자신의 바둑알을 가로 세로 상관없이 일렬로 5개를 먼저 놓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처음 몇 수를 두다 보면 서로 칭찬도 하면서 오목을 즐기면 치매도 예방이 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다가 말 수가 뚝 끊기는 순간이 온다. 당황한 표정 뒤에 억울하다는 듯이 '바둑돌을 똑바로 놓아야지'하면서 윽박지르기 시작하면 오목의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한쪽은 4개, 한쪽은 3개의 바둑돌은 오목의 신이와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외통수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는 커지고 '한 수 물려 달라', '안 된다' 하다가 결국은 알까기로 전환하는데 이때 잘해야 한다. 괜한 기분으로 알까기까지 이기면 저녁밥을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고, 하나를 포기하면 하나를 얻는 것인데 무엇을 얻고 포기할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다. 

    

2014년 바둑영화의 첫 작품인 '신의 한 수'에서 주님 역할을 맡은 안성기 배우의 명대사가 있다. '이 세상이 고수에겐 놀이터요, 하수에겐 생지옥 아니던가.....' 누군가 말한다. 바둑판은 세상살이의 축소판이라고. 인간으로 비유되는 횐 돌과 검은 돌이 서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먹고 먹히는 것이 영락없는 인간들의 세상살이와 닮은듯하다.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고수는 하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하수는 고수의 마음을 읽지 못하기에 생지옥이 되는 것이다.

     

생각의 길을 따라 바둑판의 착점에 자신의 수를 놓는다. 가로선과 세로선이 만나는 착점들은 삶에서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중요한 순간들이다. 바둑돌 모양에 따라 세상이 놀이터가 될 것인지, 생지옥이 될 것인지를 결정한기 때문이다. 바둑판은 가로 19줄 X 세로 19줄이 교차하는 361개의 착점을 가지고 있다. 모퉁이 4 귀의 화점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하고 그 중간의 화점들은 춘분, 하지, 추분, 동지를 상징하므로 인간의 1년 4계절이 모두 포함된 바둑판인 셈이다. 그리고 바둑판 정 중앙의 점은 하늘과 땅의 근원을 뜻하는 '중원'이라는 화점이다. 이렇듯 화점 9개를 포함하여 361개의 점 속에는 자연과 사람이 함께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금강경에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 뜻은 '정해진 법이란 본래 없다' 이다. 세상에 정해진 것이 없으니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세상의 일들을 정하지 않으면 세상이 나의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바둑판은 나와 세상이 마주앉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인생에서 내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최선을 다할 수 있기에 바둑에서 훈수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인생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공부를 마치면 성인으로서 결혼을 하고, 자립을 해야 한다. 물론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사회인이 되어서 성인의 생활을 하는 청소년도 많다.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학창시절에 나만의 부등표(不等標)를 확정해야 한다. 부등표의 방향에 따라 자신의 인생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부등표의 의미를 어학사전에서 찾아보니 "두 개의 수(數) 또는 식(式) 사이의 대소 관계를 나타내는 기호. 기호는 ‘<’, ‘>’이며, 기호가 열려 있는 쪽에 있는 것이 반대쪽의 것보다 큼을 나타낸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우리들의 삶에서 시간에 관한 부등표를 살펴보자.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를 향해 부등표가 열려 있다. 어제와 오늘은 힘들어도 내일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일의 행복을 기대하지 않더라도 어제와 오늘보다는 내일이라는 미래가 주는 막연한 기대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감으로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 바둑에서 하수들이 고수들에게 수를 읽히는 이유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무리수를 두기 때문이다. 한 판으로 끝나는 바둑이 없기에 다음 판을 위해서 자신의 수를 감추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삶을 영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 말은 지금 고생을 하더라도 미래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와 현재<미래라는 부등표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돈과 꿈의 부등표는 어떠한가. 돈은 과거의 물물교환 수단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의 가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다. 돈은 많이 벌 수 있다면 좋다. 하지만 누구나 많이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필요한 부의 기준을 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그리고 한 번 뿐인 인생에서 돈보다 소중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가족들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꿈과 돈 때문에 갈등하고 있다면, 이런 부등식은 어떨까. 꿈 ≥ 돈, 꿈이 돈보다 크거나 같다. 

     


앞에서 말한 영화 '신의 한 수'에서 '이 세상이 고수에겐 놀이터요, 하수에겐 생지옥 아니던가.....'라고 장님이 된 주님(안성기)이 말했다. 바둑판에서는 바둑의 급수가 높으면 ‘고수’라고 칭하고, 바둑의 급수가 낮으면 ‘하수’라고 부른다. 세상에도 돈을 잘 버는 고수가 있고, 돈을 못 버는 하수가 있다. 그리고 돈을 못 버는 하수는 고수의 놀잇감이 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러나 돈은 피보다 진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까. 이 세상은 돈 많은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생지옥이 될 수도 있고 놀이터가 될 수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자의 갑질과 인권 유린이 성행하는 것은 바둑판의 고수들이 하수들의 생각을 잘 읽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의 씨줄과 날줄은 바둑판의 가로줄과 세로줄 같아서 돈과 권력을 가진 고수들에게는 놀이터 같지만, 가난한 하수들에게는 생지옥인 것이다.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 선 청춘들. 그들은 현실과 이상에 대한 갈등으로 힘겨워한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실현하고자 노력하다 보면 내 꿈을 알아주는 스승이 나타난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이룬 대가라면 스승 자체가 꿈이 될 수도 있다. 이 관계는 고수와 하수의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의 관계가 된다. 몸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가족과 같은 것이다.  

    

멋진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 더럽거나 썩은 냄새가 지독할수록 그것을 위장하는 포장지는 두텁고 화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추악함을 지키기 위해서 완벽한 고수들의 집단을 이루며 그들만의 세상에서 바둑을 두는 것이다. 


돈의 화려함에 무질서하게 흔들리는 청춘들의 눈빛과, 꿈을 실현하는 청춘들의 빛나는 눈빛이 교차하는 바둑판의 화점에 뜬금없는 단수를 친다. 흔들리는 눈빛의 청춘들은 당황하고, 빛나는 눈빛들의 청춘은 당당하다. 결정적인 신의 한 수가 돈이 될지, 꿈이 될지는 모르지만, 꿈을 실현하는 청춘들은 희망이라는 바둑알을 쥐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생은 꿈을 이루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돈<꿈이라는 부등표가 어떨까. 

    

바둑판에는 부등식이 있다. 중원 화점이 우선이냐, 춘·하·추·동의 4 귀의 화점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에도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부등식이 필요하다. 회사의 업무를 처리하거나, 개인적인 업무를 처리할 때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서 낭패를 보는 순간이다. 결국은 바둑판이나 세상판이나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부등표를 하나 더 만들자. '='는 대소 관계가 같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인생에서는 지금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정답이 없다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바둑에서 상대방이 실수를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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