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소중한 청춘 그 의미에 관한쓸데있는참견
매년 5월 셋째 월요일은 성년의 날이다. 우리나라는 민법 제4조에서 '사람은 19세로 성년에 이르게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73년 3월 30일에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으로 성년의 날을 지정했으니 올해로 48년이 되었다. 주무부서(主務部署)는 여성가족부인데, 성년의 날에 대한 정의를 보면 '성인으로서 책임을 일깨우고 자부심을 고양하기 위한 날'이라고 되어있다.
'성년의 날'은 봄날 초록의 새싹으로 태어나 줄기를 갖추고 잎을 달고 나서 처음으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한 송이 꽃과 같은 날이다. 성년의 날을 자연으로 표현하자면 푸르름(靑)이 가득한 봄(春) 같다고 해서 청춘(靑春)이라고 쓴다. 청춘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은 즐거움이 가득한 축제와 같다. 청춘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대변하는 노래가 있는데 대중가요 '청춘의 꿈'이다.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
언제나 즐거운 노래를 부릅시다
진달래가 쌩긋 웃는 봄 봄
청춘은 싱글벙글 윙크하는 봄.....
오선지 악보의 리듬에 맞추어 노랫가락에 실려 나오는 가사들이 흥에 겨워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하다. 만물이 소생하는 자연의 청춘은 이렇듯 흥이 가득한 부푼 꿈과 같다. 청춘이 시작되는 봄날에 자연을 앞에 두고 '책임을 일깨우고 자부심을 고양‘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비논리성이 만들어낸 성년의 날에 대한 의의(意義)는, 어른들의 확증편향된 생각일 뿐이다. 축제와 같은 성년의 날에 굳이 이런 미련한 논리를 되새길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시간의 리듬에 맞추어 즐기면 그뿐인 것이다.
성년의 날을 정의한 인간들의 비논리적인 확증편향성은 다양한 영역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들의 비논리성은 책임감을 희석시키는데 무질서한 언어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정의로운 사회구현'이라는 집단적인 목표를 설정해도 '보편적 정의'와 '선택적 정의'로 양분하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양분된 정의를 재미있는 정리 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를 몰고 가는 기관사가 양 갈래의 기찻길을 만났다. 한쪽 기찻길에는 3명의 인부가 작업하고 있고, 한쪽 기찻길에는 1명이 작업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때, 1명이 작업하고 있는 기찻길로 방향을 틀면 '보편적 정의'이고, 3명이 작업하고 있는 기찻길로 방향을 틀면 '선택적 정의'라는 것이다. 단, 선택적 정의에서 1명의 작업자는 기관사의 가족이었다고 가정했다.
난 마이클 센델의 이 황당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를 몰고 가야 하는 그 시대의 비극적 상황에서는 정의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안전 불감증을 치료할 수 있는 책임있는 직업윤리가 필요한 것이다. 정의를 놓고 양분하는 순간 정의의 가치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공평해야 한다. 공평이라는 단어 속에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배분(配分)의 저울이 늘 함께 한다.
성년의 날을 맞이하는 청춘들에게 책임감을 일깨우고 정의로운 젊은이가 되기를 소망하는 어른들의 마음은 이해된다. 하지만 어른들이 실천하지 못하는 정의는 무질서한 언어들의 장난처럼 느껴진다. 인간이 행복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정의롭게 유지되도록 국가가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순전히 어른들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이미 교육의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며 성년의 날을 맞이하는 젊은이들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빛은 그 존재로서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축복인 것이다.
성년의 날을 맞이하는 젊음의 청춘에게 책임을 일깨우고 자부심을 고양시키기에 앞서 어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대중가요의 ‘청춘의 꿈’처럼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성년을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축하를 해준다. 책을 좋아하는 청춘에게는 만년필이나 책 같은 선물로, 터프하고 남자다운 청춘과는 술 한 잔 나누면서 삶의 고민들을 생각하기도 한다. 청춘의 고민은 우리 사회의 고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청춘에 대한 명제는 논리학적으로 분명하게 '예' 또는 '아니오' 나 '참' 혹은 '거짓'으로 검증될 수 없다. 노나라 시대의 공자가 강물을 바라보면서 '흐르는 것은 저러하구나' 하듯이 청춘도 흐르는 강물처럼 그러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그리스어로는 '피시스(physis:태어나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자의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하다)의 뜻과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청춘이다. 그래서 청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떤 모양이나 색상으로 있어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보인다.
인간의 청춘과 자연의 청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청춘에 대한 인간들의 비논리성과 달리, 자연의 청춘은 보편적인 합리성을 갖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흙에서 자생하는 모든 생명들은 흙의 심장소리와 함께 깨어난다. 흙은 땅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든 식물과 생물들에게는 어미니 같은 존재이다. 겨울의 메마른 흙속에서 생명을 키워갈 수 있는 것은, 흙이 어미의 자궁처럼 생명을 끌어안고 자신이 가진 모든 영양분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봄의 땅은 새끼를 낳는 어미의 산고와 같다. 이때 흙은 찢어지는 아픔을 참아내며 자신의 살을 뚫고 나오는 식물들을 땅 위로 밀어낸다. 가녀린 새싹은 흙의 심장을 뿌리로 부여잡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내고 희망의 여정을 쑥쑥 키워나간다. 이렇듯 위대하고 숭고한 땅의 축복은 봄날의 아름다운 청춘의 풍경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자연이 만들어가는 봄날의 청춘은 풍경으로 보여준다. 나무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풍경은 숲에 있다. 나무들의 숲은 인간들의 사회와 같은 구조로 움직이는데 무질서한 불균형은 초라하지 않게 소멸하고 아름답고 균형있게 소생한다. 나무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객체지향적이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원을 얻기 위해 인간처럼 애쓰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바람을 타고 오는 햇빛과 물방울은 잎으로, 땅의 심장이 요동치는 생명의 흙에서 나오는 영양분은 뿌리로 받아들인다.
나무의 뿌리가 흙의 생명을 부여잡고 땅의 심장을 관통하는 여정은 하늘을 향한 줄기와 잎의 의지이기도 하다. 어쩌면 뿌리의 여정과 하늘을 향한 나무의 우듬지는 같은 꿈을 향해있다. 그리고 나무의 줄기는 뿌리의 여정과 잎의 꿈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곳이다.
나이테의 동심원을 보면 나무의 삶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자연이 만들어 가는 청춘의 기록인 것이다. 나무들의 동심원은 자신의 삶을 확대 해석하여 우월성을 자랑하지도 않고, 축소해서 초라한 시간들을 나이테에 기록하지 않는다. 나무의 삶이 논리정연하게 기록된 나이테의 동심원을 다른 나무들이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기록함으로써 나무는 자연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청춘은 확증 편향성이 만들어낸 비논리적인 기록으로 무질서하고 애잔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이어지는 기록들은 밑도 끝도 없는 황당한 글들이다. 과거의 청춘들이 고생하고 아프게 살았으니 현재의 청춘들도 그렇게 살아가라는 것은 다소 억지스럽다. 이렇듯 어른들의 무질서한 비논리성이 되풀이되는 과정들로 인하여 미래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되풀이되는 과거가 현재의 악몽으로 재현되어 청춘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잘못이다. 문제는 현재의 어른들이 그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 있다.
자연은 봄을 소유하려고 욕심내지 않는다. 지구 공전의 시간에 맞추어 계절의 모양새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봄이 여름으로 치닫는 것을 아쉬워한다. 그래도 봄의 역동적인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여름으로 다가오고 가을과 겨울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공간은 일정하게 반복되는 우주의 시간 속에서는 형이상학적이지만, 지구라는 공간에서는 형이하학적 관계 이동을 하면서 추론적인 논리성을 갖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변화이다. 지구의 계절 변화는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진 채로 자전과 공전을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우리들의 하루가 만들어지고, 공전으로 인하여 우리는 1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그래서 자연과 계절의 관계는 추론으로만 가능한 형이하학적인 공간으로 잇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공자의 말처럼 ‘흐르는 것은 저러하구나’로 대변될 수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청춘의 모습인가가 아니라, 존재하는 청춘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인데 젊음의 청춘은 자구의 자전축처럼 무한한 시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그런 청춘에게 책임감을 줄 필요는 없다. 흐르는 시간이 저러하듯이, 청춘도 그러한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