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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로 Jun 10. 2021

사람이 꽃보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8. 작업복이 멋있어 보이는 우리들의 자식들

누구는 말한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그런데 또 누군가는 아름다운 꽃을 소유하고 싶다는 이유로 꺾어다가 자신만의 공간 속 꽃병에다 꽂고 구경한다. 인간은 다양한 감정으로 만들어지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그 정당성은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꼴이 된다.  '이 꽃 예쁘지?', '오늘 들판을 산책하다가 들꽃이 엄청 예쁘게 피어서 꺾어왔어'. 꽃병에 꽃을 꽂는 그의 표정에는 칭찬받아야 마땅하다는 듯이 기쁜 표정이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이유는 생명의 지속성을 단절해야 할 것이 아니라 축복하고 응원해줘야 할 일이다. 

    

대지의 심장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은 들꽃들은 땅이 허락하는 만큼의 생명력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식물들도 종족번식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DNA 유전자에 인식된 프로그램대로 꽃을 활짝 피운다. 꽃의 향기로 벌과 나비들을 유혹하여 자신의 꽃가루를 수정시키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한다. 꽃으로 살아가면서 모은 정보들은 그들의 유전자에 기록되고 그 유전자를 단백질로 함축시켜 꽃씨로 만들면 비로소 자신의 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꺾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구라는 공간에서 존재하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생명체들에게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모순된 이론과 이중적 잣대로 애매모호하게 생명의 범위를 인간 중심으로 정의하고 있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 그리고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 은하계가 속한 우주에는 지구가 먼지 같은 크기로 분해된 숫자보다도 많은 행성들이 있다. 그리고 그 행성 속에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추정할 수 없는 생명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우주라는 큰 공간에서 지구는 먼지보다도 작은 크기인 존재인데 먼지 속에서 기생하는 생명들의 가치를 인간들의 한계로 정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람의 생명은 어떠한가? 우리 인류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상호조약과 법을 만들고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문제는 인간들의 생명이 모두 평등하게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편리성과 배타적인 이기심을 이유로 생명에게 이름표를 붙여 차별하고, 생명의 가치를 훼손하는 오만함을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피부색이나 경제력으로 차별받는 생명들에 필요한 것은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이 아니라, 생명의 유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생명의 유지는 들꽃의 삶이나 인간의 삶이나 모두 절대적이며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난 사람들이 꽃을 꺾어 꽃병에 꽂으면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 가끔씩 소름이 돋는다.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사람의 생명을 꺾어버리려는 인간의 양면성이 보이면 무섭기까지 하다.   

  

들판에서 자라나는 들꽃의 꽃 봉오리가 탐스럽다. 사람들은 청초한 이슬을 머금은 초록의 꽃망울을 꺾지 않는다. 꽃의 희망을 품은 꽃망울을 보면서 활짝 핀 꽃 모양과 향기 그리고 색상을 가늠하기 어렵고, 청초한 꽃망울은 아직 꽃의 열정의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꽃망울 속에 있는 꽃잎 하나하나가 자신의 색감과 향기를 세상에 쏟아부으면 그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른다. 

   

인간들도 꽃 봉오리처럼 설렘과 희망이 가득한 시기가 있는데 바로 청춘의 시간이다. 청춘들의 꽃망울 속에도 열정의 향기와 생명유지를 위한 꿈이 담겨있다. 그런데 어른들의 탐욕으로 꽃망울 같은 청춘의 생명을 꺾어버리고 합리화시키거나 변명하는 추악한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도 수많은 청춘들은 어두운 터널에 갇혀 감정의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무질서하게 흔들리고 있다.



TV나 인터넷 뉴스에서 알게 되는 꽃망울 같은 생명이 사라지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어떤 청춘은 사회와 격리된 군대라는 공가에서, 어떤 청춘은 돈을 좇는 자본주의 회사의 일터에서, 어떤 청춘은 배움의 터전인 장소에서 자신만의 색감으로 아름다운 꿈을 그려가다가 무자비하게 꺾이고 외면당한다. 이렇듯 무능력한 국가의 행정력과 확증 편향된 어른들이 만든 사회의 절벽에 매달린 청춘들은 위태롭게 매달려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말을 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청바지 꼰대라고 불리는 어른들의 ‘라테는 말이야~’하는 소리는 한심하기만 하다. 밑도 끝도 없는 과거를 들먹이면서 현재를 폄하하고 미래를 현혹시킨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 혹은 ‘주민등록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은근히 젊은 청춘들을 깔본다. 음흉함이 가득한 어른들의 말 한마디에는 니코틴과 알코올에 찌들어 악취가 가득하다. 그런 사람들은 ‘나이도 어린것이 어른한테 대들지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 밖에 할 줄 모른다. 탐욕과 권모술수가 만연한 어른들의 세상에서 순수한 청춘들이 열정 하나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어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탐욕스러운 괴물이 되어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청춘의 꽃망울을 야금야금 씹어 먹으려 한다. 이러한 어른들의 무질서한 삶의 논리는 청춘들을 절망으로 빠뜨린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멘티(Mentee)를 이끌어주는 멘토(Mentor)가 필요하고 그 멘티가 다시 멘토가 되어 상부상조하면서 유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어른들은 열정이 가득한 청춘들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청춘들이 갖고 있는 ‘열정’과 ‘도전’은 독일의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달리는 스포츠카처럼 거침없이 달려 나가야 한다. 청춘들이 무제한의 속도로 거침없이 미래로 달려갈 수 있도록 어른들이 아우토반 고속도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청춘들의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을 담은 감정의 쓰레기통은 바람에 날려 뒹굴고 확증 편향된 어른들이 만든 불통의 절벽에 위태롭게 서 있다. 

     

청춘이 가지고 있는 도전과 열정은 소중한 인류의 자산이다. 그 도전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어른들이 그 열정으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고 있다. 대학교에서는 교수들이, 직장에서는 상사와 사장들이, 사회에서는 사기꾼들이, 군대에서는 상명하복이라는 규율로, 모임에서는 어리다는 이유로 청춘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라테는 말이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하는 관행들은 사회 곳곳에서 청춘들을 유혹하는 독버섯처럼 만연되어 있다. 이런 악마의 관행이 청춘들을 무질서하게 흔들고 자유를 박탈하여 자존감을 잃게 만들고 결국은 죽음으로 내몰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권력과 돈의 유기적인 먹이사슬로 민주주의의 개념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돼 있지만, 주권은 상류층에게 있고 권력은 공무원들의 몫이다. 기업인들은 이윤을 창출한다는 이유로 근로자들에게 생명을 요구한다. 5년이 지난 구의역 김 군부터 태안화력발전소 김 군 그리고 평택항 이 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돈과 권력이 만든 악마의 관행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악마의 관행은 돈과 권력을 숙주로 한 단계 진화하면서 한 마디 한다. ‘앞으로 재발방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들의 이런 습관은 청춘들의 죽음에는 무관심하고 국민들의 관심을 희석시키는데 열중하고 있다.    

 

돈의 노예가 된 민주주의 권력은 ‘열정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면서 청춘의 열정을 모기처럼 빨아먹고 있다. '열정 페이'라는 말이 어학사전에 등록이 되어 있는데 그 뜻이 어이가 없다. 다음 국어사전에 '청년 구직자를 고용하면서 열정을 빌미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정을 빌미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열정 페이를 부르짖으며 청춘의 열정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회적 분위기가 얼마나 치욕스러운가?  

    

‘열정페이’를 만들어낸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어른들은 지나간 청춘이 아쉬워서 '청춘을 돌려다오'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노래 가사에 있는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디 갔느냐'며 구성지고 애처롭게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 묘한 딜레마에 빠진다. 마치 그들의 과거에는 청춘이 없었다는 듯 묘한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지나간 청춘을 애원하면서 찾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지금 이 시대의 청춘들이 내가 찾는 청춘이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청춘들의 인생을 내 인생같이 생각하고 자신처럼 후회하며 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법과 제도를 만들면 된다. 그러면 꽃을 피우지 못한 채 꽃 봉오리로 꺾어지는 청춘은 없을 것이다. 오늘도 산업현장에서는 지나간 자신의 청춘을 찾는 어른들의 모순된 논리와 외면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의 꽃망울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죽음으로 통곡하고 있다.   

  

나훈아 / 청춘을 돌려다오 [1절]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의 애원이란다
못다 한 그 사랑도 태산 같은데
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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