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음악이었다.
영어, 음악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다닌 영어 학원은 사실, 동네 공부방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그때도, 영어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라고들 하는)에 처음으로 제대로 ‘영어’라는 걸 접해본 곳이었다. 내가 살던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에 거주하는 뽀글 머리의 ‘아줌마’ 선생님은 사실, 영어 전공자도 아니고 당시 주재원이었던 남편을 따라 캐나다에 2년 이상 거주하다 한국에 들어왔는데 지금 내 기억에도 그 선생님의 발음은 그다지 ‘원어민’스럽지 않았던 걸로 보아 영어 교육 전문가의 카리스마보다는 푸근하고 친절한 이미지의 동네 공부방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늘 수업 시작 전 키우던 강아지의 배변 냄새에 난감해하면서, 캐나다에서 같이 들고 온 향수를 뿌려대셨다. 오래된 향수와 강아지의 쉬 냄새가 섞인, 책이 가득한 작은 방에, 알리바바와 도적들에 나올법한 (아마도, 선생님 애완견의 흔적이 가득할) 오래된 페르시안 문양의 카펫 위에 앉아 내 또래의 아이들 서너 명이 모여, 선생님이 ‘외국’에서 갖고 온 책을 같이 보면서 나의 ‘영어’는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갖고 온 물 건너온 그 책은 ‘GENIUS’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EBS 청소년 드라마 같은 내용의 에피소드로 채워져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미국의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겪는 일, 사춘기 반항, 핼러윈 축제 문화 등등 온갖 사건 사고를 담고 있었다. 단순히 단어와 문법을 달달 외우는 줄 알았던 나는 당시 나는 겨우 알파벳만 떼고 그 공부방에 들어갔는데, 그 영어책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에 단단히 매료되어서 나중에는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보게 되었다. 6권의 책 내용이 저절로 외워질 때까지 말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 6권의 내용이 12살의 내 머리와 심장에 박히면서 내가 평생을 영어로 먹고 살게 될 줄은.
내가 12살이란, 다소 늦은 나이에 영어를 접하고도, (나중에 대조언어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언어학적으로 원어민의 억양과 발음을 ‘습득’할 수 있는 나이는 12세까지라고 본다.) 완벽하진 않지만 억양과 발음이 북미 표준 영어에 거의 흡사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운명 같은 ‘책’(GENIUS)을 만났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책’에 딸린 비디오에서 설명해 주는 목소리는, 전형적인 북미표준영어의 매끄럽고 세련된 성인여성의 목소리였다. 화면 속 미국 어린이들은 의성어와 의태어로 가득한 말들을 뱉어냈지만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문법을 설명하는 미끄러지듯 매끄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북미표준영어의 그 억양이 내겐 ‘음악처럼’ 들렸다. 어찌나 이국적이고, 고혹적인 리듬이었는지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똑같이 해보고야 말리라’는 오기와 각오가 생겨버린 것이다.
영어의 첫인상이, 내 평생 변주 되는 운명 같은 음악이었다면, 그 뒤 단어시험, 문장 외우기 등의 반복적인 학습과 연습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또 있었는데 그건 바로 같이 수업을 듣던 남자아이였다. 늘 주황색, 녹색 줄무늬가 섞인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그 티셔츠 안에 숨길 수 없는 뱃살이 존재감을 드러내던, 키가 작고, 늘 코 막힌 소리로(지금 생각해보니 그 아인 만성 비염을 앓고 있었던 듯하다.)
영어 책을 읽던 같은 나이의 남자아이는 나보다 훨씬 일찍 영어를 시작했고, 그 공부방도 다닌 지 오래된 터라, 알파벳만 떼고 간 나와 수준이 같을 수 없었다. 영어 공부 진도만 늦었지, 눈치나 승부욕은 이미 안드로메다 수준이었던 나는, 그 ‘찐따’ 같은 남자애가 나의 처참한 첫 단어 시험 결과를 보고 만면에 띄우던 우월감의 표정을 진심으로 역겨워했다. 그리곤 다신 그런 '모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죽어라고 단어를 외워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라톤 같은 외국어 학습여정에 나에겐 좋은 러닝메이트였을 텐데, 그땐 어린 마음에 그 남자애를 이겨야겠단 생각으로 점수에 더 집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뒤로, 운명처럼 6권의 영어 책이 머리에 들어오고, 1년 만에 고1 영어 수준까지의 문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저 즐겁게 매료돼서 했던 ‘외우기’가 외국인을 만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게 되는 수준이 되어있었다. 당시 가구점을 하시던 부모님 가게에 외국인 손님이 오면 가서 말을 걸고, 짧은 영어실력의 아빠를 도와서 물건도 팔고, ‘잘하게 된’ 영어를 어떻게든 더 잘해보려고 애쓰던 유년 시절을 지나 중학생이 되었다.
자연스레 외국어고등학교를 가면 영어에 더 노출되고 더 잘하게 되리란 생각을 하게 됐고, 집안 사정은 점점 더 어려워졌지만 진학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기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사립 외고의 비싼 교복과 입학금, 등록금을 내며 나의 외고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나는 외고에서 일반 고등학교보다 훨씬 더 많은 시수의 영어와, 또 다른 외국어인 중국어(전공)를 접하며, 원어민 선생님과 베프가 돼서 실용적으로 영어를 쓸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었다. 그 뒤로도, 인터넷이나 서점에 나와 있는 자료로 돈 안 들이고 영어 공부하기는 나의 습관이자, 루틴이 되었다.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단순히 외국어가 아니라, 애증의 관계이고, 정복되지 않는 높은 산이며, 자자손손 대물림되는 ‘업보’ 같은 존재이다. 언어학적으로도, 우랄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한국어와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는 영어는 닮은 점이 없는 대척점에 서있는 언어다. 같은 어군에 속하는 터키어, 핀란드어를 쓰는 원어민들 중 한국어를 빨리, 완벽히 습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나도 늘, 내가 영어에 들인 시간만큼 중국어에 (한자를 공유한다는 어마어마한 장점) 들였으면 나는 지금의 내 영어보다 훨씬 완벽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운명 같은 첫사랑이었던 영어를 지금까지도 놓지 못하고, 쓰지 않으면 도태되는 형벌 같은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쓰고, 한국에서만 나고 자라 공부하면서 통역, 번역, 국제 행사 진행 등등을 한다. (심지어 영어 성우 일도) 나를 만난 수많은 고객들과 지인들, 동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점도 그것이다. 외국에 살지 않아도, 오랜 시간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한국에서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하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답을 먼저 말하자면, 가능하다. 차고 넘치도록 가능하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포함해 모든 언어는 쓰지 않으면 도태된다. 외국에 오래 살고 있는 교포들의 고민도 비슷하다. 한국어를 쓰지 않으니, 모국어도 유창하지 않고, 한국인 커뮤니티에만 머물고 있으니, 영어도 쓸 일이 많지 않아 영어도 늘지 않는다고. 나의 거주지가 미국인지, 캐나다인지, 호주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매일매일 접하는 환경에서 영어를 얼마나 쓰느냐가 ‘지금’, ‘현재’의 실력을 결정짓는 것이다. 40년 넘게 사는 동안, 심지어 여행으로도 미국, 호주, 영국등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에 가보지 못한 나는, 나의 그 ‘결핍’이 나를 더 채찍질하는 동력이 되었다.
코미디언들 중에 외국어 흉내를 잘 내는 사람들은 실제로 언어적으로 재능이 갖춰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웃기려고, 흉내 내는 중국어(특히 홍콩영화에 자주 나온 광동어)의 성조는 사실, 코미디언의 귀에 그게 들리기 때문이다. 남방계 언어 특유의 늘어지는 억양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은 ‘성조’가 있는 언어의 높낮이의 차이점도 잘 구분하기 힘들다.
영어를 내 오장육부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지 30년이 넘었다. 내 몸 어딘가에 체화 되어 있어서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생각나지 않는 단어와, 한국어로 ‘적확’하게 치환되지 않는 블랙홀 같은 언어의 어떤 지점,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굳어 버리는 뇌가 사실 내가 매일 접하는 현실이다.
영어를 계속 쓰다 보니, 일로 연결이 되고, 일을 하다 보니, 계속 잘해야 하고, 잘하려면 끝없이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며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그 일을 위해 공부하고 연습을 해야 한다.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영어 실력에 만족하거나, 이만하면 됐다 싶었던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날이 오지 않을 거란 걸 안다.) 특히나 누군가가 내게 대가를 지불하고 하는 일에 실수를 하거나, ‘더 나은 표현’을 쓰지 못한 순간은 집에 와서 이불킥을 해대다 잠을 못 자고 일주일은 동굴에 들어가서 칩거를 하며 지낸다. 그런 내게 위로가 되기도,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는 말이 있다. 내 영어 노트 표지에 적은 말이다.
*‘Vigilant Parade’ (조금도 방심하지 않는, 퍼레이드)
모든 언어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퍼레이드, 행렬이다. 멈추는 퍼레이드는 없다. 온갖 화려한 의상과 기상천외한 소품을 달고 끊임없이 손 흔들고, 움직이고, 웃어주고 어디론가 계속 이동하는 퍼레이드. 퍼레이드가 멈추면, 퍼레이드가 끝난 것이다. 멈춰버린 언어는 죽은 것이다.
John Mcwhorter란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영문학 교수가 한 팟캐스트에 나와서 '요즘 아이들'(MZ세대)이 멀쩡한(?) 영어를 마구 바꾸거나 줄여서 뒤죽박죽 섞어 놓는 행태에 대해 언어란 원래 'vigilant parade', 1초도 멈춰 있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모양을 바꾸고 공간을 이동하는 퍼레이드라고 했다. '움직이지'(변하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어진다는데, 굳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변주'하는 퍼레이드를 막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고 했다.
나는 끊임없이 어디론가 이동하며 움직이는 언어(영어)를 내 작은 손으로 다 잡을 수가 없다. 언어의 본질과 운명이 어디론가 끊임없이 흩어져 버리는 공기 같은 것이라면, 나는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공기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외운 것이 내일 증발되더라도, 내일 또 주어지는 새로운 공기에 자족하며 콩나물 키우듯이 끊임없이 나의 뇌 속에 영어의 물을 뿌려주는 수밖에… 그러니,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자꾸만 달아나는 이 야속한 대상의 본질을 부정하거나 후회하거나 하는 일은 부질없다.
외우면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까먹고의 빈도수가 잦아지면서 나에겐 'vigilant'란 단어가 더 고맙게 느껴진다.
vigilant와 유사한 단어를 찾으면 anxious, attentive, cautious, keen, observant 등이 나온다. 늘 경계를 살피고, 주변의 변화에 아주 민감하며, 때론 불안하고, 주의를 기울여서, 예민하게 관찰하며 조심해야하는! 존재이다. 내가 모국어 외에 제2외국어를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감정과 스트레스의 지점이 이와 매우 비슷한데, 언어를 내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사는 삶은 원래 그런것이라고 신뢰할 만한 권위를 가진 누군가가 내게 위로로 건넨 단어가 vigilant가 되버렸다. 영어란 것에 신물이 날때가 있다. 아무리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손에 쥐어지지 않는, 수증기처럼 기화해버리는 대상을 사랑하게 된 숙명을 타고 났다고 속으로 주억거린다.
나는 아마도, 내가 영어를 쓰면서부터 내게 열린 또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그만두지 않는 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아도 영어란 존재 자체를 탐닉하지 않을까 싶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짝사랑이 앞으로 내게 또 어떤 길을 열어줄지 기대하면서, 또 걱정을 한가득 안고서, 꾸역꾸역 오늘 자, 뉴욕타임스 기사를 읽어본다.
*Hidden Brain:
John McWhorter says the problem might be with you, not with the way other people speak. John is a professor of English and comparative literature at Columbia University. He's also the author of the book, "Words On The Move: Why English Won't - And Can't - Sit Still (Like, Literally)."
https://hiddenbrain.org/podcast/watch-your-mou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