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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Kim Aug 01. 2024

Well Done :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

Well done으로 잘 구운 행사, Medium Rare 아닙니다.


국제행사를 진행하는 MC, Moderator로 일한 지 14년째가 되었다. 십 년이 넘게 행사를 치르면서 웬만한 돌발 상황은 놀랍지도 않은(?) 행사의 ‘고인 물’이 되었지만, 끝나고 계속 곱씹게 되는 행사가 있다.

기업에서 외국인 손님을 초대해서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는 신제품을 소개하는 로드쇼 같은 일인데, 작년에 우리나라  대표식음료 기업에서 새롭게 베이글을 출시하면서 ‘시식회’를 열게 되었다.


 식음료 시식회를 전문 MC를 고용해서 할 정도이면, 기업 입장에서는 꽤나 중요한 자리이다. 이번 시식회도, 캐나다 밀을 수입해서 빵을 만들면서 캐나다 농축산부, 캐나다 곡물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회사에서 주한 캐나다 대사를 초대하면서 일이 커진 셈이다. 나도 식음료가 주제인 행사는 처음이라서, SPC 본사 홍보팀 담당자와, 대행 에이전시와 미팅을 하러 가는 자리에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참여했다.


주한 캐나다 대사님은 여성분이셔서, 보통 대사를 부를 때 쓰는 경칭 타이틀 His Excellency가 아닌, Her Excellency가 된다는 것부터 예전 외교부 산하 국제기구를 다니면서 인이 박히도록 익힌 ‘외교’ 의전 tip 전수, 중간에 베이글을 개발한 연구원이 직접 나와서 제품 설명을 할 때 진행할 순차통역까지 지금까지 해온 국제 행사와는 많이 다른, 그만큼 다채로운 행사가 꾸려졌다.


드디어 행사 당일, 강남역에 있는 가장 큰 파리바게트 매장에서 테이블을 정리하고 행사장이 차려졌다. 행사 2시간 전부터 꽃 단장한 베이글이 디스플레이 돼있고, 모던하고 깔끔하면서도 따듯한 분위기의 행사장에는 달콤한 빵 냄새와 버터 향이 가득했다.


회사의 대표와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가 참석하는 행사라 담당자분들은 초 단위로 큐시트를 업데이트를 하며 긴장감이 아주 넘쳤다. 그러나 나는 이미 빵냄새에 녹아서 잔칫집에 초대받은 낭창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오늘 행사가 잘 될 거란 기대에 차있었다.


 '그동안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국적만 해도 40개는 넘을 거라'며, 박봉에 온갖 멸시와 욕을 먹으며 버텼던 시절의 보상으로 챙긴 천하무적 ‘외국인’ 친화력과 외교부의 각 잡힌 정통 의전만 지키면 별일 없을 거라며, 통역할 대본을 주섬 주섬 읽으면서 캐나다 대사님을 기다렸다.


행사 15분 전, 호스트와 게스트의 입장시간을 철저히 맞춘 그러나 무척 자연스럽게 두 주인공이 등장했다. 한국의 대표님은 유학파답게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하신 듯했고, (이럴 경우 나는 통역의 짐을 덜고 게스트만 챙기면 된다.) 나는 캐나다 대사님에게 가서 호칭을 어떻게 불러 드리는 게 편할지 여쭤보고 약간의 스몰토크와 함께 내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짧은 금발 커트머리의 우아한 캐나다 대사님은 자국의 농축산 산업과, 한국회사의 빵으로 재탄생하는 ‘캐나다 산 밀’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셨다.


한국의 문화를 경험하고 배우는데도 적극적이신 그분의 ‘태도’에 나는 행사의 ‘중요한 의전 대상’ 이상으로 호감이 생겼다. 외국인들과 같이 일을 하다 보면, 한국의 조직문화에서 목을 매는 의전과, 형식을 탈피해서 합리적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는데 캐나다 대사님도 그런 분이었다.


나는 긴장되는 행사 전에, 내 마음의 우군을 만들어 놓는다. (속 마음은 안 그런 줄 알지만) 대부분의 행사에서 한국인들은 멋쩍어서 농담에도 잘 웃지 않고, 반응도 별로 없다. 그에 반해 외국인들은 대부분 호의적이고 리액션이 좋다. 무대 앞에서 썰렁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할 의무를 지닌 나 같은 사람들은 이럴 경우 리액션 좋은 우군을 생각하며 행사를 이끌어 갈 수밖에 없다. (속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반응해 준다고 착각을 만들어가면서 행사가 시작되었다.


나의 가장 큰 우군은 캐나다 대사님이라 생각하고, 나는 행사 분위기가 처질 때 마다 응원을 갈구하는 다정한 열의의 눈빛 레이저를 마구 쏘아 대며 진행을 했다.  드디어 6가지의 베이글을 종류별로 다 맛보는 ‘어색한’수도 있는 시식 시간과 베이글 개발자인 선임 연구원의 개발 에피소드를 통역하는 것, 제일 중요한 사진 촬영까지 무사히 다 끝이 났다.


그리고, 행사를 마무리할 때 캐나다 대사님은 나에게 오셔서 딱 한마디 하셨다.


“Well done!”


근데 ‘웰 던’이란 그 말이, 내 귀에 꽂히는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바싹 익힌 스테이크’가 떠올랐다. (!!!!!!!!!!!!!!!!!!!!!!!!!!!!!!)

나의 이성과 지식은 ‘well done’이 ‘잘했어요’의 뜻이란 걸 알지만, 나의 감성과 ‘습관’은 제일 먼저 ‘스테이크’가 떠올랐다. 다른 어떤 행사보다 이번 베이글 시식회가 나에게 오래오래 남는 것은 바로 이 말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혼자 내적 친밀감을 max로 키운 대사님이 나에게 ‘You did a great job!이나 ‘Thank you for your hard work, it was really great.” 같이 좀 더 기일~~~ 게 나의 마음 졸임 service를 치하해 주길 바랐나 보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는 이럴 때 난 ‘국내파’의 한계가 간접적으로 느껴진다. 순전히 나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웰 던’을 스테이크 주문 할 때 외엔 (피 많은 거 못 먹는 나는 늘 미디엄 웰던을 외침!) 쓸 일이 없는 나는, 아주 오래전 ‘well done’을 스테이크 굽기와 전혀 상관없는 상황에서 쓰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런 작고 큰 ‘충격’들이 쌓여서 (나 자신이 스테이크가 된 상상을 하면서) 지금의 내 업을 이어 가는 것이긴 하겠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 마다 느껴지는 ‘이물감’이라고 해야 하나…


영어를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서 ‘극복’ 해야 하는 평생의 과업 같은 대상에서 웬만큼 즐기면서 할 수준이 되었다 싶을 때, 귀신같이 알고 찾아오는 이 ‘이물감’이 솔직히 불편하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칭찬하는 상황이 나에게 무척 빈곤했던것은 아닌가 싶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칭찬의 언어가 너무나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권의 영어를 쓰면서도 기껏해야 good job을 날려주곤 끝이었다.


이날 베이글 시식회 행사 이후, well done이란 단어는 나에게 좀 다른 의미가 되었다.


첫 번째, 영어가 편해지는 시점은 없을 것이다.

두 번째, 평소에도 well done을 쓰는 상황을 만들어보자. 즉 누군가에게 격려와 칭찬의 의미를 더 많이 베푸는 사람이 돼보자.


그래서, 나는 행사가 끝나고 기념품으로 받은 '두번 쫄깃' 베이글을 집에 들고 가서, 아주 바삭 바삭하게 'well done'으로 구워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많은 크림치즈를 발라서 먹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오늘 첫째 숙제 봐주면서 한번 시원하게 말해줘야지.

WELL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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