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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Kim Aug 10. 2024

Resilience: 끈질기게 회복하기

인생은 바선생처럼?

나는 검은색 교복 치마와 검은색 재킷을 벗지 않은 채, 무릎을 그러모으고 구석에 앉아 나도 이 칠흑 같은 어둠의 일부분이 되어
소멸하기를 꿈꾸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차고를 개조한 부엌이 딸린 단칸방에 살았다. 부산 연산동의 대로를 접한 주택가에 오래된 집들이 어지럽게 엮여 있는 골목에 위치한 남루한 주택이었다. 주인 입장에선 남는 방 하나에 어떻게든 살림집 구색을 맞춰서 월세를 받으려다 보니 차고를 개조해서 대충 싱크대 하나 박아놓고 시멘트로 높은 턱을 올려놓은 조리대가 있는 곳이 우리 집 부엌이었다.


차고인지, 부엌인지를 모를 공간을 지나면 바로 방문턱이 나온다. 성냥갑 두 개를 길게 세워놓은 듯한 모양의 이 방에서 나는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을 지냈다. 시멘트 벽에 방문 이랍시고 네모모양으로 파놓은 듯한 입구에 매번 머리를 부딪치는 것까진 참을만했다.


문제는 방바닥을 만들다 말았는지 바닥이 기울었단 것이다.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오면 11시, 겨우 이불을 깔고 누우면 기울어진 바닥에서 나는 나만 빼고 세상이 뱅글뱅글 도는 듯했다. 잠을 잔 것인지, 놀이터에서 뱅뱅이를 타다 깬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던 나는 늘 두통에 시달렸다.


그리고, 차고를 개조한 집 ‘안’에 있을 리가 만무한 화장실은, 마당을 가로지른 대각선 후미진 끝에 위치한 푸세식이었는데, 그때 개봉한 영화 ‘식스센스’를 보고 나서 화장실을 갈 때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부모님은,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사실상 수입이 없었다. 평생 해오시던 가구점의 연이은 부도로 아빠는 내가 중학교 때 경제사범으로 교도소에 가시고, 오빠는 기숙사 학교를 전전했다. 그러다 내가 중3 때 네 식구가 겨우 모이게 되었는데 방 두 칸짜리 이층 집에 세를 들어 살다, 그마저도 세를 낼 돈이 없어 결국 차고를 개조한 단칸방으로 옮겨 가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싶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으로 떨어지다 결국 차고를 개조한 집에 처박혔다 생각하니 기가 찼다. 그러나 그동안 이 기울어진 집에서 겪은 불편은 여름이 되기 전 예고편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자, 하수구가 부엌 바로 앞에 있는 이 집에는 벌레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자잘한 날벌레, 나방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질 맨 밑바닥에서 등장하는 바로 그것, ‘바선생'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내 생애 마주친 벌레들 중 가장 거대한 크기로.


불쾌한 한낮의 열기가 남아있는 저녁 바람이 불 때쯤,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방안의 불을 켜기 전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3초 후 방바닥에 벌어질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사실, 불을 켜기 전 이미 바닥에서 파닥파닥, 타닥타닥 날개를 뒤집으려고 하는 소리에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기 시작하면 나는 차마 불을 켜지 못하고, 대학생인 오빠가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손가락 두 마디 만한 크기의 날아다니는 그것은, 잘 때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수능이 100일쯤 남았을 어느 날, 새벽 2시쯤 기울어진 방바닥에서 자던 나는 손등 위로 뭐가 지나가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화들짝 깼다.


같이 자던 오빠와 소리를 지르며 이불을 털어대고 난리를 치는데, 시커먼 그것이 빛의 속도로 방문 밖을 향해 도망가는 것을 본 이후로 나는 그 집에서 이사 갈 때까지 쪽 잠만 잤던 것 같다. 내가 까무룩 잠이 든 사이, 그것이 내 온몸을 기어 다니다 사라졌을 생각을 하니 도저히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검은색 교복 치마와 검은색 재킷을 벗지 않은 채, 무릎을 그러모으고 구석에 앉아 나도 이 칠흑 같은 어둠의 일부분이 되어 소멸하기를 꿈꾸었다.   


나와 두 살 차이가 나는 오빠는, 그런 나를 보며, 때려도 잘 죽지 않는 ‘바선생’들을 모아 화형식을 했다. 기울어진 집의 유일한 장점이 마당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오빠는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와 혐오를 영혼까지 끌어 모아, 마당에 바선생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불을 붙이는 동안 나에게 에프킬러를 뿌리라고 했다.


'이런 것들은 불에 태워서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며 어금니를 꽉 깨문 오빠를 보며, ‘이 집에 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질질 짜선 안 된다고, 아무도 네가 우는 걸 달래줄 사람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오빠의 옆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날이 되었다.


고3, 수능 전 방학 보충수업이 아침 8시에 시작되는 날, 전 날부터 하늘에 구멍이 난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 기울어진 우리 집에 비가 들어 쳤다. 현관보다 낮은 차고에 부엌을 만든 자리엔 물이 제일 먼저 차기 시작했다. 마당에 있던 하수구가 막혔기 때문이다. 작은 원형 싸구려 식탁이 놓인 자리엔 되는 대로 쌓아놓은 엉성한 살림살이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어젯밤 라면 끓여 먹고 쌓아 놓은 양은 냄비, 엄마가 아끼던 압력 밥솥, 싸구려 플라스틱 그릇 덩어리, 그리고 6번의 이사 중에도 이고 지고 싸매고 온 내가 아끼던 책들까지. 지하 세계에 인간들이 싸질러놓은 모든 토사물이 물 밖으로 올라온 해괴한 악취가 교복을 입은 내 정강이까지 차 올랐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하는 나에게 엄마는 학교를 가라고 했다. 오빠랑 알아서 할 테니 얼른 학교를 가라고 했다. 나는 오물을 헤치고 이미 다 젖어버린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쏟아지는 폭우를 낡아 빠진 우산으로 막아 대며, 악을 쓰듯이 걸어갔다.




나는 하수구의 오물이 묻은 양말을 신고, 빗물에 잠기다시피 한 구두가 내는 철벅 철벅 소리를 들으며 얼굴에 때려 붓는 빗물 속에서 울었다. 이 집에 사는 동안 절대로 울면 안 된다고 했던 오빠의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지만, 나는 하늘에서 퍼붓는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통곡을 하며 울었다. 


이렇게 비참하고 막막한 기분으로, 삶이 계속된다는 것이 이상했다. 내가 이렇게라도 크게 울어야 그동안 내 울음소릴 듣지 않으시던 하나님이 들어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 와중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아볼 수 없을 때 울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자신이 끝도 없이 미웠다.


비가 멈추고, 살림살이를 버리고, 청소를 하고 그렇게 다시 형벌 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어떻게 버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불에 덴 흉터 같은 기억들 중 하나로 남은 기울어진 집, 바퀴벌레, 그리고 하수구가 범람한 날은 이후, 내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으려면,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자신을 닦달하며 내 가치를 올리는 것.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것이 바닥이란 생각이 들면 스스로에게 경고 사인을 주고 그 뒤에 올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해야 하는 것. 다시, 바퀴벌레와 같은 방에서 자고 싶지 않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현실을 탈출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방법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내가 꿈꾸는 화려한 직업을 보란 듯이 쟁취하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TV에 나오는 사람이 될 거라 믿었다. 신문, TV 등의 언론 매체는 나에게 신성한 그 무엇이었고, 궁극적으로 올라야 할 꼭대기 같은 것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호기심과 관심이 궁핍하고 비참한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오히려 반발심에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가 돼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이 비참할수록, 내 꿈은 더 화려해졌다. 유학을 갔다 오지 않아도, 외국에서 살다 오지 않아도, 영어방송 아나운서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한계를 뚫지 못한다면 궁핍했던 과거에 지는 거라고 스스로 승부욕을 자극하면서 살았다.


지금의 나는, 국제행사 무대에서 MC로 설 때도 있고, 통역을 하고, 영어 PT대행을 하고, 해외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광고 내레이션을 하는 성우이지만, 지금의 내 모습 어딘가에 하수구 오물을 묻힌 교복을 입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악을 쓰듯이 고3 보충수업 오르막길을 오르던 소녀가 있다. 


이후 내가 ‘뚫어야 했던’ 수많은 한계와 평가 앞에서 그동안 켜켜이 쌓인 열등감과 콤플렉스의 민 낯을 마주해야 했다. 내가 맞닥뜨린 한계의 개수만큼 나는 부모님을 원망하고, 내 환경을 탓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할 때마다, 거절을 경험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원망했다. 나를 탓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었으니까.



내가 목숨처럼 생각하는 지금의 나의 커리어는, 사실 내 목숨이다. 나의 자존심, 대리만족, 모든 상실과 좌절에 대한 보상, 어린 시절의 반짝이는 꿈 등등.  단순히 직업이라고 하기엔 농축된 감정들이 많이 엉켜 있다.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나의 모든 복잡한 욕구가 현재까지 이어져서 나는 그동안 참 많이 피폐해졌다.


Resilience :  회복 탄력성.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이제야, 살점이 뜯길까 봐 열어 보지 못한 상처를 대면하고 마주해보려고 한다. 코로나 이후,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한 단어 resilience를 접할 때마다 나는 가장 무기력한 모습으로 기울어진 방에 쭈그리고 있었던 내 모습이 그려진다. Resilience가 말하는 원동력은 자격지심과 분노, 원망이 결코 아닐 것이다. 위기와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을 믿고, 스스로를 지지하며 이겨내는 대신, 나는 '끈질기게', '쉽게 굽히지 않는' 비교의식과 목표지향적인 태도로 살아남으려고 했다. 


나에겐 분명히, '살아남고자'하는 욕구와 저력이 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을 '근성'이라고 여기며 버틴 것이지 어려움과 상처에서 '회복'된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나에게 굽히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는(Resilient) 것만 느껴지던 단어가 코로나를 지나면서 '회복'이란 맥락을 얻었다.  나의 새로운 Resilience는,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그 시절의 나에게 늦게나마 말을 걸면서 시작될 것 같다.


울어도 된다고. 황망함, 억울함, 막막함, 분노, 외로움 그 모든 감정이 다 당연한 것이라고. 이후에 겪을 모든 좌절은 네가 잘 못 한 것이 아니라고. 그 시간을 지나온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기울어진 방 모퉁이에서 무릎을 그러모으고 앉아, 하나의 검은 점이 되어 사라지길 바랐던 그 시절의 나에게 다가가서 꼭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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