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김으로 자라는 아이
얼마 전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다가 믿기 힘든 광경을 보았다. 내 앞에 앉은 여성 두 명 중 한 명이 돌은 한참 지났을 듯한 여자 아이가 품에 안겨 있다 눈을 비비자,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것이다. 한낮에 수도권을 누비는 1호선에 승객이 없기는커녕, 나를 포함해 그 칸의 대부분이 서있을 정도로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그 여성은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마치 자기 집에서 아이에게 젖을 주듯이 평온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수유를 했다.
젖을 먹는 아이의 이마에 연신 뽀뽀를 해주는 그 옆의 여성은 아마도 '이모'이거나 아주 가까운 사이로 보였는데, 그녀 또한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검색하며 계속 아이엄마와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들 앞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나는 이 두 명이 몽골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대학 때, 몽골인 룸메이트와 같이 기숙사 생활을 한 나로서는 몽골인들의 신체적 특징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약간은 넓은 하관과 홍조를 띤 광대, 그리고 작게나마 속삭이는 그들의 말이 한국어가 아닌 것을 듣고 몽골인이라 짐작했다.
여행자인지, 거주자인지 알 수 없지만 몽골인들이 드 넓은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아이들을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키운다는 걸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나라도 아닌 타국에서 대 낮,서울 지하철 안에서 수유라니... 몸을 가리는 천이나 그 어떤 것도 없이 엄마의 넉넉한 티셔츠 안으로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몸짓과 자세로 통통한 손으로 엄마의 젖을 꼭 누르며 먹기에 열중하는 아이의 곰살대는 곱슬머리에 맺힌 땀방울을 보며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부러움과 경이로움을 느꼈다.
물론, 이 능숙한 몽골인 엄마는 자신의 신체가 전혀 노출되지 않게 노련하게 수유를 했지만, 건너편 경로석에 앉은 할머니들의 표정을 보니 나 못지않게 적잖이 놀란 표정들이셨다. '수컷'은 절대로 눈치챌 수 없는, 새끼를 품어본 여성들만의 숭고한 비밀 같은 경험이 공유되는 순간, 나는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마음에 늘 되뇌었던 단어를 그 몽골인 모녀를 통해 다시 곱씹었다.
Embracing...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그저 품어주는 것. 아이를 허벅지 위에 놓고,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체위로 눕히고 양팔로 세상의 모든 위험과 불안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주듯이 감싸 안는 것.
나와 아이가 가장 사랑했던 그 자세가 다시 생각나면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첫째가 태어난 뒤로, 나는 늘 아이와 부대꼈다. 태어나길 예민한 기질을 가진 데다, 잘 자지도 먹지도 않는 내 아이가 크는 모든 과정에 어느 하나도 수월한 적이 없었다. 둘째가 태어나고서는 내가 첫째에게 너무 심하게 엄격해지고 소리 지르는 일이 잦아지면서 5살도 안된 아이가 바닥에 머리를 계속 박는 등 자학을 하기도 하고 더 예민해졌다. 그 뒤, 아이는 소아정신과로, 나는 상담소, 정신과 등을 전전하며 첫째가 소아우울증 초기라는 얘기에 마음이 무너졌지만 그런 충격요법까지도 피폐해지고 너덜너덜해진 내 품을 넓혀주진 못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둘째가 2살 정도가 되기까지 나는 임신, 출산, 육아의 모든 것을 다 고스란히 떠안고 프리랜서로써의 일도 ‘유의미한’ 결과, 즉 끊기지 않고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최고점에 달했다. 그때 내 정신상태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연민, 분노, 무엇보다 주변의 화려한 싱글로 승승장구하는 동기들, 심지어 아이를 낳고도 계속 ‘잘 나가는’ 후배들에 대한 질투 등으로 차마 돌아보기 무서운 수준의 참담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출산을 하고 불어 터진 듯한 몸과 찢기기 직전의 멘털로 양가 부모님 도움 없이, 육아와 살림을 하면서 겨우 면면히 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서 퇴소한 직후, 출산 직전에 의뢰가 들어온 행사에 나가게 되었다.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걱정을 하기는커녕 '둘째를 낳은 경단녀에게 일이라니...'라고 혼잣말하면서 너무나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정장 재킷 사이에 부어오른 배를 실크 스카프로 가리고 말이다.
그 무렵 나는 결혼과 출산 이후, 나처럼 경력의 ‘멘붕’이 온 후배와 연락을 하고 지냈다. 그 후배는 170cm 키의 모델 같은 외모에, 내가 지원했다 떨어진 방송국의 캐스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늘 내게 일과 육아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그 애는 가사도우미 이모님을 쓰면서, 틈 나는 대로 마사지와 시술을 받으며 예전에 넣은 코의 필러가 맘에 안 든다면서 나에게 둘째는 ‘어떻게 낳는 거냐’고 물어봤다. 외동으로 자랄 아이를 생각하면 둘째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둘째를 임신하고 기를 자신이 없다고. 일을 더 못하게 되면 어떡하냐고. 언니는 어떻게 둘이나 낳아 키울 생각을 했냐고.
그때 비루한 자존감을 가진 애 둘 엄마이자 허울만 좋은 프리랜서 워킹맘인 나는 그 후배가 결국은 둘째를 가지지 않을 거면서도 나에게 그런 조언을 자꾸 구할 때마다 겨우겨우 가라앉혀 놓은 상처를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일은 나중에, 기회는 언제든, 아이는 지금 아니면 안 되는’ 이란 스스로 세운 대명제가 시작부터 잘못됐단 걸 자꾸 인정해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내세운 명제가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살얼음판을 걷듯 지낸 시절이었다. 둘째 이유식을 먹인 후, 기껏 만든 소고기브로콜리죽이 반 이상 바닥에 떨어진 걸 걸레로 닦으면서, ‘일하는 나’의 존재가 걸레에 흉물스럽게 늘어져 붙은 버려진 이유식과 같단 생각을 하며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하고, 노력해서 얻은 직업의 특수성, 나의 조급한 성격, 기질은 차처 하더라도 첫째를 낳고 기르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고 부대꼈던 것은 아이를 품어주지 못하는 좁아터진 내 품이었다. 3살도 안된 첫째에게 훈육이랍시고 몰아세우고 있는 나에게, 참다못한 남편이 애를 왜 직장동료 대하듯이 하냐고 지적했을 때에야 내가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는 첫째가 마냥 엄마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연약한 아이로 대해 지지 않았다. 첫째가 말문이 트인 2살 때부터 나는 이 아이가 애정과 감정보단, 논리와 이성으로 대할 수 있는 존재이길 바랐다. 이제 말이 통하니까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던 건지, 끊임없는 보살핌과 애정을 갈구하는 대상을 훌쩍 뛰어 넘어서, 나에게 더 이상 ‘무언가’를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길 너무 일찍 바랐던 것이다.
2살, 3살밖에 안된 아이가 애정과 사랑을 요구하는 말, 행동을 예의 바르게 할 수가 없는데, 조금이라도 내가 생각한 선을 넘었다 싶으면 아이에게 매몰차게 대했다. 하지만 유난히 부대끼는 그 지점에서, 아이를 밀어내며 나는 매 순간 내 안의 어린아이가 존중받지 못하고, 홀로 버려지는 걸 끊임없이 떠올려야 했다.
사실, 내 아이를 버겁게 밀어낼 때, 내가 왜 그랬는지 알고 있었다. 내 아이는, 내가 어린 시절 듣고 싶었던 딱 그 말, 부모님이 내게 했어야 했던 다정하고 인격적인 행동, 분위기를 너무나 정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 삼켜야 했던 수많은 상처와 실망의 순간들로 다시 돌아가, 내 아이는 자신의 몫을 너무나 당당히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같은 상황 속에서 내가 차마 바라지 못했던 그 애정과 존중을 내 아이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요구했다. 첫째의 모습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자꾸만 겹치는 것이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다. 엄마가 되려면, 내 안의 가장 숨기고 싶었던, 자라지 못한 어린 나와 화해하고, 성장해야 하는 숙제를 먼저 마쳐야 한단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회상하는 것조차, 너무 힘이 들어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야 하는 그 기억 속, 그때의 어린 나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의 나를 안아주며, 인정해 주며, 위로해 주는 것이 내 아이를 사랑하는 첫걸음이 된다는 것을.
故 박완서 선생님은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의 ‘따뜻한 입김에 의지해서 자랐다’고 하셨다. 새끼 입에 들어가는 국물이 혹시나 뜨거울 까봐, 연신 호오호오 불어 식혀주는 엄마의 입김. ‘을매나 아팠을꼬’ 하며 진심 쓰린 속으로 ‘호오호오’ 까진 상처를 불어주는 할머니의 입김. 조부모님과 엄마의 입김에 담긴 사랑으로 자란 선생님은, 요즘 ’ 아이들은 어머니의 입김이 서리지 않은 음식을 먹고도 배부르고, 어머니의 입김이 서리지 않은 옷을 입고도 등이 따뜻하고 예쁘’ 게 자란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입김으로 자라는 아이들이 줄어들는 것이 못내 아쉽다고 하셨다.
나의 첫째가 나에게 바라는 것도 바로 그 입김이다. 엄살떨 일이 아니지만, 우리 엄마니까 한번 아프다 해보는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안아주고받아주는 엄마가 늘 내편이란 걸 확인해 보는 것. 완벽한 논리로 무장한 이론도 아니고, 거창한 명분도 아니다.
그러나 그저 받아주고 헤아려주는 엄마의 품이 필요한 아이에게, 첫째가 고민을 얘기하면 내가 그렇게 헤쳐왔듯이, 나는 자꾸 구조와 프로세스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쪽으로 결론을 짓게 된다. 하나를 실수하면 굴비 엮듯이 이전의 잘못까지 줄줄이 꿰 올라온다. 그래서 그런지 첫째가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엄마 미안해’인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끝이 바늘로 콕콕 쑤셔대듯 아프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에서, ‘입김으로 자라는 아이’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첫째에게 못해주는 게 무엇인지가 명확해졌다. 나에게 없는 그것. 결핍된 그것. 그러나 엄마가 된 나는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것.
Embracing이란 단어를 들으면, 나에겐 '껴안아주다'란 원래 뜻보다 '품어 주다'로 느껴진다. 영어로 '임. 브. 리. 싱'이라고 또박또박 발음을 해보면,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포물선을 그리고 그 안에 내 아이를 사랑으로 전부 감싸 줄 수 있는 엄마의 입김으로 채우고, 아이들이 자유롭지만 충만한 사랑 속에서 뛰어노는 게 상상이 된다.
규율과 질서가 있지만, 아이의 자유와 인격을 인정해 주고, 엄마의 ‘입김’이 서려 있는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공간... 그리고 사랑받을 몫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엄마의 품'말이다. 앞으로도 아이들과 씨름하며 내 품이 좁아터졌다고 느낄 때마다 나를 붙잡아 주던 이 단어를 생각하며 내 팔로 그릴 수 있는 사랑의 포물선이 조금씩 더 확장되고 있다고 믿고, '품어주기'로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