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 아무에게나 요새 외롭냐고 물어본다면, 크고 작음이 있을 뿐 열에 여덟 명은 외롭다고 답하지 않을까?
한국에 살면, 각박한 현실, 불확실한 미래의 압박에 지금 뭐라도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불안’을 연료로 끊임없이 자신을 태우고 있는 주변인들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 본인이 외로운지, 고갈되고 있는지 헤아려보거나 돌아볼 새도 없이 그저 바쁘게 바쁘게만 지내는 이웃들, 그리고 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지난 14년간, 바쁘지 않으면 나의 사회적 효용가치가 바닥을 치면서 그저 ‘애 엄마’로 남은 생애를 살게 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지냈는지, 일을 마치고 난 후, 고객사의 사소한 리액션과 피드백에 얼마나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갔었는지 자각을 할 새도 없이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들, 특히나 내가 눈치를 보고 있는 수많은 ‘고객님들’, 그리고 절대로 찍히고 싶지 않은 학부모 모임의 ‘엄마들’, 엘리베이터에서 아이 마스크 제대로 안 씌운다고 한소리 하시는 ‘어르신들’ 등등 나의 이웃이자 나와 작고 크게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외로운 존재라는 걸 아주 생뚱맞은 공간에서 알게 되었다.
바로,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었던 냄새, 체취이다.
특히, 아이 둘을 무사히 등원, 등교시키고 한숨 돌리며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타는 아침 시간에는 방금 전 이 공간에 있었던 이의 직업, 나이, 사회적 지위가 유추되는 냄새가 더 강하게 남아있다. 바쁘게 출근을 하는 이였는지, 바쁜 부모를 대신해 등원을 시키고 들어오는 할머니, 할아버지였는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알 수 있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기 전 살던 아파트에서는 특히나 진한 향수를 쓰는 중년의 여성 분이 있었는데 출근 시간에 그분이 남기고 가는 향이 어찌나 진했던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 9층의 그분이 출근을 언제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고, 2층인데도 골프채 때문에 꼬박꼬박 엘리베이터를 타는 남자분은 스킨 냄새가 아주 독특해서, 이분도 유추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17층인 우리 집으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같이 탄 둘째 유치원 친구 엄마랑 ‘남은 체취로 주인 맞히기 게임’을 하면서 오늘은 9층의 그분이 좀 일찍 가셨네, 어쨌네 수다를 떨곤 했다.
그리고, 내가 이 모든 흔적이 외로움의 냄새라고 결론을 짓게 된 날은 바로 노인들 특유의 ‘가령취’(加齡臭)가 엘리베이터에 가득 찼을 때였다.
오래된 약방이나, 약장에서 풍겨 나오는 나프탈렌 묵힌 듯한 그 냄새는 나이가 들면서 혈관에 찌꺼기나, 노폐물등이 쌓여서 피부를 뚫고 나오는 냄새라고 했다. 중년의 남자들이 술, 담배, 땀으로 절어 있는 체취를 숨기기 위해 쓰는 진한 스킨을 발라도, 가령취는 웬만한 향수나, 화장품으로 숨겨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 나이테처럼, 혈관에 쌓인 냄새라니,,, 육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모세혈관 사이사이에 나이만큼 채워진 냄새가 있다는 게 지워지지도 바꿀 수도 없는 지문처럼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주변에 젊은 나이에 그런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있어서 찾아봤더니 나이가 젊을 때는 땀 흘리는 운동을 해서 혈액의 노폐물을 배출하면 나아진다는 것까지 찾아본 기억이 난다. (그 사람에게는 차마, 가령취라고 말하진 못하고 소심하게 운동을 권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새 집으로 이사 와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엘리베이터의 ‘냄새 창고’가 되살아난 것은 최신식 아파트의 번쩍번쩍한 새 엘리베이터에 가득 차 있던 그 가령취 때문이었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와 샛노란 금박을 두르고, 최신 기능을 갖추고 있는 ‘젊디 젊은’ 엘리베이터에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온 점잖은 노부부의 냄새였을까, 퇴직 후,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어르신의 외출이었을까,
코를 찌르는 가령취에,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인간 본연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둔해졌다고 생각한 후각이 오히려 더 기민해진 것인지, 아니면 나이 들면서 생뚱맞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인지, 엘리베이터에 머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바쁜 현대인들의 삶의 흔적이 지울 수 없는 냄새로 남아서 내 오지랖과 상상력 공장을 마구 가동하는 것이다.
가령취의 뜻을 알 게 된 이후, 내게 '쇠락'을 뜻하는 deterioration은 외로움과 같은 말이 되었다. 오래된 건물의 잔해, 몇백 년의 세월을 견딘 고목의 떨어져 나간 껍질을 연상케 하는 deterioration은 나이 듦, 쇠약해짐을 시각화한 단어로 느껴진다. 오랜 기간 쇠락을 향해가는 동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잎을 떨구는 시절을 반복하기에 바빠서 그 쇠퇴의 시간이 새겨진 것도 모른 채 살아온 흔적을 냄새로 맞닥뜨릴 때, 인간 본연의 외로움이 훅 끼쳐왔다.
쇠약해질 시절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바쁘게만 살 때는 인지할 겨를이 없다. 하지만 잘 차려입고, 바쁘게 구두를 고쳐 신으며 후다닥 몸을 싣는 그 작은 공간에 각각의 인생과, 순간이 냄새로 담긴다는 사실이, 전혀 생뚱맞은 ‘타인’에게 전해진다는 걸 본인만 모른다는 것이 위트를 곁들인 서늘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인간이 가장 숨길 수 없는 체취가 결국 외로움의 냄새인 것은 아닌지... 산다는 것은 나이 듦, 쇠락(deterioration)을 향해 가는 시간의 연속이다.
바쁘고 분주한 시간이 쌓여서 결국 소멸로 가는 동안 그 시간의 흔적 속에 나만의 냄새를 남기게 된단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가끔 궁금하다.
나 또한 무수히 많은 시간 '엘리베이터에 갇힌 냄새'를 만든 사람일 테니, 나의 외로움은 어떤 냄새였을까? 일하러 가기 전 몇 시간 동안 화장하고 단장한 시간의 냄새는 어땠을까? 행사가 아무 문제 없이 끝나기를, 멋진 하루를 고대하는, 기분 좋은 긴장이 담긴 향수 냄새였을까?
별일 아닌 일로 야단치다 결국 아이를 울려 보낸 아침, 급히 신은 슬리퍼 속에 삐죽이 나온 맨 발처럼, 그날은 내 자괴감의 냄새도 삐죽 났을까?
내가 떠나고 난 자리에 내가 남기고 갈 냄새가 신경 쓰이는 나이가 되었다. 그것이 외로움만 가득한 가령취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면서 나의 쇠락( deterioration)이 어떤 향기를 품을지,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