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트레킹 14편
남아있던 다이아막스를 올라오는 대학생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초콜릿, 컵라면 등의 간식들도 모두 주었다. 이제 나는 내려가니까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평소에 간식을 거의 먹지 않던 나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트레킹 중에는 이것저것 많이 먹었다. 고산지대를 걷는다는 것 자체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저 멀리 내가 넘어온 산들이 보인다. 첩첩산중을 넘고 넘어서 갔다가 다시 넘고 넘어서 왔다. 구름이 산능선을 따라서 흘러간다. 구름도 쉬어 넘는 높은 산. 저 멀리 실같이 보이는 길을 걸어왔다. 까마득한 옛날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방금 전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뿌듯하면서도 허무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밀려온다.
강아지가 귀여워서 한참 바라보니까 소년이 나와서 강아지를 들어 올려 보여준다. 그러더니 집 뒤쪽으로 가서 고양이와 강아지를 데려와 함께 보여준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신기하고 귀엽다. 그리고 소년의 친절함이 순박하고 귀엽다. 너희들 모두 너무 귀엽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만난 네팔 사람들은 참 순박하고 좋았던 거 같다. 오가면서 만난 포터들도, 마을 사람들이나 롯지 주인들도, 마안과 같은 가이드들도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이드에 대한 안 좋은 경험이나 롯지 주인들의 상술에 대해 비판한 글도 있었는데 나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순박해서 참 좋았다.
마지막 관문처럼 버티고 있는 출렁다리를 건넌다. 다리가 꽤 튼튼하고 최신식이다. 그 옆에 예전 다리가 있다. 여름에는 저런 다리들은 다 떠내려간다. 하지만 새로 놓은 다리는 떠내려가지 않는단다. 만약 여름에 온다면 이 튼튼한 다리에 무지하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 계곡을 넘을 때 등산화를 벗고 바지를 걷어붙이고 넘어야 할 테니까. 그리고 거머리를 떼어내야 할 테니까. 다음에는 봄이나 가을에 와야겠다. 마안이 그토록 자랑하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와야겠다. 트레킹이 끝나갈수록 나는 자꾸 이곳에 다시 올 이유를 찾고 있다.
다리를 건너고 나니까 느낌이 다르다. 이제는 정말 문명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흡사 제주도 돌담길 같은 길이 펼쳐진다. 갈림길이다. 저쪽으로 가면 고레파니로 간다. 즉, 푼힐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하지만 나는 무릎 상황 때문에 늦어져서 그냥 패스! 간드룩으로 간다.
간드룩은 꽤 큰 마을이다. 돌담길을 따라 걷는데 길이 참 예쁘다. 골목골목 갈림길도 많고 건물도 많다. 그리고 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마을에서 소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소는 고산지대에서 살기 어려운가 보다. 근데 어딜 가나 소의 눈은 왜 슬퍼 보이지?
여기가 불교국가임을 다시 느낀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니차'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한 바퀴 돌리면 불경을 한번 읽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손에 들고 다니는 마니차도 있고 이렇게 벽에 붙어있는 것을 지나가면서 돌리는 것도 있다.
마안이 나에게 트레킹의 마지막 숙소니까 나이스뷰를 원하냐고 묻는다. 당연히 그렇다고 했더니 옥탑방으로 안내를 한다. 이 힘든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헉헉 힘들어 죽겠다. 나이스뷰라더니 구름이 잔뜩 끼었다. 하지만 멀리 설산이 보이는 것이 내일 아침 날씨만 좋으면 정말 나이스뷰일 것 같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정말 조용한 옥탑방이다. 밤에는 좀 무서울 수도 있겠다. 나란히 몇 개의 방이 더 있지만 아직은 아무도 안 들어와서 너무 좋다. 느긋하게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다리를 앞의자에 올려놓고 세상 편한 자세로 일몰을 감상했다. 그리고 밤에 별이 총총 뜨니까 여기의 진가를 잘 알 것 같았다.
별을 보다가 문득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생각났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별도 그렇다. 밤하늘에 별이 가득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별무리로만 보인다. 자세히 보아야 반짝반짝하는 별이 보인다. 별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밤이 되자 한국에서 온 대학생들 몇 명이 올라왔다. 그들은 트레킹을 시작한 첫날이란다. 공용식당으로 내려가니 이제 막 트레킹을 시작한 한국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팁을 알려줄 수 있어서 좋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누난다'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꼈던 것이 생각난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가슴 두근거리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도전을 이룬 자에 대한 부러움도 느낀다. 지금 나는 도전을 이룬 후 내려가는 사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어쩌면 인생도 그러하지 않을까? 성취를 이루고 이제 내려가면서 여유롭게 후배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마음. 그런데 실제 우리 사회에서는 내려가는 모습들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쩝, 또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 걸 보니 속세에 다 내려왔구나. 그래, 쓸데없는 생각이 정말 많아졌다.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