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트레킹 15편
트레킹의 마지막 밤이라 그런지 잠을 설쳤다. 문득 등산의 의미만큼이나 하산의 의미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올라가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며 올라갔는데 지금은 내려오면서 왜 내려오냐는 질문을 거의 던지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올라갔으니까 내려간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없다.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가? 아니,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까?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날씨가 너무너무너무 좋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일출을 기다린다. 구름이 완전히 걷혀서 안나푸르나와 마차푸레르가 한눈에 보인다. 마안이 왜 여기를 권했는지 알겠다. 풍경이 너무너무 좋다.
해가 뜨기 시작하자 다시 황금빛으로 물드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마지막 일출을 이렇게 또 보게 되어서 정말 감사하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무사히 트레킹을 마친 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게 해 준 것도 감사하다.
숙소에서 내려와 출발하기 전에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다시 한번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를 사진에 담는다. 이제부터 내려가면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 하늘과 구름까지 돕는다. 마음껏 마음에 담아 가라고 하는 것 같다. 밝고 아름답다.
출발하기 전에 한 번 더 마음에 담는다.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주연에 구름과 하늘이 조연이다. 아름다운 영화 한 편 같다.
이제 '간드룩'에서 '사울바자르'까지 내려가서 차를 타고 '포카라'로 돌아간다. 즉 마지막 걷기이다. 마지막 걷기를 위한 가방을 메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올라갈 때는 속세의 근심과 걱정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놓으며 올라갔다면 내려오면서는 그 근심과 걱정을 하나씩 하나씩 다시 어깨에 올리는 것은 아닐까? 벌써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다.
아니다. 그런 거라면 너무 허무하다. 그럴 거라면 왜 힘들게 올라갔다 왔는가?
이제 어디 가서 나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레킹을 해 본 사람이라고 신나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 안나푸르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나푸르나에 도착하기까지의 그 걸음걸음을, 그 과정에서 본 아름다운 경치를, 그곳에서의 힘겨운 숨들을, 푸근하게 내려다보던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을, 그 밤을 나는 기억한다. 기억? 아니 그것은 새로운 세포가 되어 나의 일부가 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여행들이 그러했듯이.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몸뚱이의 절반은 여행 세포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이, 인도의 갠지스 강이, 페루의 마추픽추가, 그 모든 여행이 나의 일부가 되었다. 안나푸르나도 그렇게 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결론은? 일상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처리해야 할 일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나는 또다시 시간에 쫓기면서 정신없이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 한편에 아름다운 안나푸르나가 등불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멋진 마차푸차레가 그윽하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힘내서 일하고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이다.
계단식 밭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쉽게 배웅하고 있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레르가 보인다. 이게 마지막 모습이다. 어느 순간 마을이 많은 곳까지 내려왔다. 여기서부터는 마을이 많고 큰길도 많다. 이런 계단길을 내려가기도 하고 마을을 가로질러 내려가기도 한다.
올라오는 트레커들도 많이 보았다. 이제 정말 시작인데 벌써 힘들어하는 꼬마도 보았다. 어쩌냐, 십 분의 일도 못 왔는데. 그러나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심정을 아니까. 하지만 시작을 했으니까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이 어렵지 시작하고 나면 결국 가게 된다. 트레킹도, 인생길도. 이제 누가 봐도 차가 다니는 길이다. 이제 나의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끝났다.
'포카라'에서 하루 묵고 '카트만두'로 오는 비행기. 히말라야를 담아본다. 나의 도전은 아름답게 끝났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도전을 할 것이다. 지금 나의 마음에 안나푸르나와 마차푸레르의 응원이 느껴진다. 나는 할 수 있다. 나의 도전은 아직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을 향해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