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속세로

안나푸르나 트레킹 11편

by 바람

이제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하산을 시작한다. 그런데 힘들게 올라온 것에 비해 너무 빨리 내려가는 거 아닌가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아쉽다. 안녕! 안나푸르나! 언제 또 오게 될지 모르겠지만 너는 항상 그 자리에 있겠지? 잘 있거라. 아름다운 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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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푸차레와 구름

마차푸차레 쪽으로 해님이 강한 햇살을 펼친다. 눈이 부시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구름이 햇살을 덮어 버린다. 갑자기 우화가 생각난다. 해와 바람이 내기를 한다던, 그런데 여기서는 해와 구름이 내기를 해도 될 듯하다.




사진 777.jpg 멀어져 버린 안나푸르나

벌써 안나푸르나가 저만큼 멀어져 있다. 올라올 때보다 내려가는 것이 좀 더 수월해서 속도가 난다. 그래서 마안이 내려가는데 2일 정도면 된다고 한 거구나. 올라올 때는 보통 3박 혹은 4박 정도 걸리지만 내려가는 것은 2박 정도면 된다고 했다. 설마 했는데 확실히 내려가는 것이 올라오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고 속도가 난다. 신기하다.




사진 795.jpg 코끼리 모양의 구름

앗... 코끼리 구름이 날아간다. 구름이 시시각각 변한다. MBC도 지나고 이제는 그동안 목표로 하고 걷던 방향을 등지고 걷는다. 기분이 묘하다. 마치 선계에서 인간계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다. 저기 내가 내려가야 하는 속세가 있는 방향이다. 가기 싫다.

벌써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오후 12시 30분이 조금 넘었다. 여기는 올라올 때 안나푸르나 도착 전 마지막 숙소였다. 그런데 내려가는 속도는 더 빨라서 여기서 묵지 않고 더 내려간다.




사진 815.jpg 히말라야의 폭포

멀리 보이는 폭포,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폭포다. 올라올 때 보았던 것인데 내려갈 때 보니까 좀 더 여유롭게 보게 된다. 올라갈 때는 무사히 잘 도착하기를 바라면서 다소 긴장했다면 지금은 뭐랄까, 숙제를 마치고 난 다음의 마음이다. 그런데 속세로 돌아가는 것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 같은 것이 있다. 뭐지? 이 이중적인 마음은?




사진 825.jpg '도반'에서 바라본 마차푸차레

여기는 '도반'이다. 원래 '간드룩'까지 가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가 될 듯하여 '도반'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루 묵기를 잘한 것 같다. 여기에 유료 샤워시설이 있어서 드디어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 온수기로 따뜻하게 데워진 물로 샤워를 한다. 가스 온수기가 설치된 롯지가 많지 않아서 기회가 왔을 때 씻는 것이 좋다.

다만 놀라운 것은 수도관이 오직 온수만 연결되어 있어서 냉수는 없고 오직 뜨거운 물만 나온다는 것이다. 그나마 섭씨 100도의 팔팔 끓는 물이 아니라는 점과 위쪽에 나 있는 자그마한 창문에 유리가 없어서 찬바람이 그대로 들어와 물을 금방 식혀준다는 점 덕분에 씻을 수는 있다. 뜨거웠다가 차가웠다가를 오가면서 하는 겨우 씻었다.

그래도 따뜻한 물로 씻으니 너무나 개운하다. 출발하기 직전 새벽에 씻은 후 5일 만이다. 아, '지누난다'의 온천도 있었지? 하지만 그건 씻었다고 말할 수 없고 몸만 담그고 나온 거였다. 아, 너무 시원하다. 다만 아직 고도가 높고 춥기 때문에 샤워를 하고 나니까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잽싸게 씻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미리 따뜻한 물통을 넣어둔 침낭 속에서 체온을 유지하다가 또 잽싸게 히터가 틀어진 식당으로 달려간다.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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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과 다시 시작된 계단

'도반'에서 아침 8시 30분에 출발한다. 멀리 힐끔 보이는 마차푸차레의 정상을 뒤로하고 다시 내려간다.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걸어갈 때는 한국과 별다른 차이를 못 느낀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어디쯤인 것도 같다. 다시 계단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계단을 올라가는 것보다 내리막이 더 힘들다. 내리막에서는 무릎이 너무 아프다.




사진 861.jpg 마차푸차레와 콜라 한 잔

나의 마차푸차레를 가린 얄미운 구름. 그리고 점심을 먹을 겸하여 쉬면서 문명의 혜택으로 시원한 콜라도 한 잔. 수고한 나에게 주는 상이다.

그리고 그 옆에 시커먼 물통은 그동안 나를 따뜻하게 해 준 등산용 물병이다. 이것과 황금색의 한쌍을 선물 받았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주방에서 뜨거운 물을 사서 이 스탠 물통에 받아와서 그걸 양쪽에 품고 침낭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얘가 밤사이에 따뜻하게 나를 지켜주고 새벽에는 미지근하게 식는다. 미지근하게 식은 그 물로 아침에 양치를 하고 가볍게 세수를 할 수 있다. 물론 마실 수도 있다.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는 소중한 물병이다.

그리고 추위에 대비하는 소중한 아이템 중 하나는 핫팩이다. 나는 옷에 붙이는 핫팩을 가지고 갔는데 이 핫팩은 가급적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붙이기를 권하고 싶다. 대체로 오후 4~5시에 걷기를 마무리하는데 그때부터 붙여야 가장 필요한 시간인 한밤중에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걷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이 녀석을 떼는 것이 좋다. 안 그러면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과 걸으면서 생기는 자체 발열 때문에 너무 더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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