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9편

by 바람

MBC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는 물가가 아래쪽보다 두 배 정도 비싸다. 도반 이후부터는 당나귀나 말을 이용해 짐을 나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일일이 지고 날라야 한단다. 당나귀나 말조차 짐을 지고 이 길을 가기 어려운데 사람은 그게 가능하다니....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이 강한 것인가? 독한 것인가?




사진 620.jpg 안나푸르나를 향하여

MBC를 출발하였다. 정면으로 안나푸르나가 보인다. 산을 오를 때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마지막 구간에서는 산 정상이 모습을 감추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올라갈수록 아까 훤히 보이던 안나푸르나가 차츰 안보이게 된다. 어쩌면 인생사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일의 막바지에는 항상 그 고비가 있다. 거기서 마지막 희망이 안보인다고 느끼고 포기하면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마지막 고비를 잘 넘겨보자.




사진 618.jpg 웅장한 마차푸차레

뒤를 돌아보니 멋드러진 마차푸차레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멀리 마차푸차레 정상과 MBC가 보인다. 제법 많이 걸었나보다. 속도는 아까보다 더디다. 오르막에서 발걸음이 천근만근 힘겹게 느껴진다.

난 아무래도 안나푸르나보다 마차푸차레에 더 반한 것 같다. 아직 안나푸르나의 품에 안겨보지 않아서 속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지금은 마차푸차레가 더 좋다.




사진 635.jpg 힘겨운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앞질러 가는 트레커도 옮기는 걸음걸음이 힘겹게 보인다. 여기서는 다들 서로 지나가면서 격려한다. 마지막 힘을 내라고. 나도 보통은 파이팅, 굳럭이라고 말하지만 지금은 한국말로 '힘내세요.'라고 말한다. 지금은 언어가 중요하지 않으니까. 다들 알아듣고 미소를 짓고 인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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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안나푸르나

멀리서 불이 났을 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뿌연 구름이 덮힌다. 경치가 너무 아름답고 신비롭다. 하늘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의 일부를 본다. 개미처럼 작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다.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지구의 중심에서 멀어지니까 중력의 영향을 덜 받아서 발걸음이 가벼워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산소가 부족하다. 숨호흡이 조심스럽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까지 산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느낌에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심장이 조이는 것 같다. 이것도 실제로 조인다기 보다는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어쩌면 해발 4000미터를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무의식을 지배하여 이러한 신체 증상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662.jpg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입구

드디어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 입구에 도착하였다. 해발 4130미터. 여기에 오려고 이 긴 고행의 길을 걸었다. 도대체 왜?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는 서너 개의 롯지가 있다. 그 중 마안이 안내해주는 곳에 짐을 풀고 나오니 해가 지고 있다.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다.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여기저기 구경을 다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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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탑과 추모비

무사한 산행을 기원하는 탑이 있다. 소원을 비는 천이 많이 묶여져 있던 곳인데 지금은 산행 비수기라서 다 제거되어 있다고 한다. 무척 황량한 모습이다. 그 많은 소원들은 다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을 추모하는 비석도 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묵념을 드려본다. 해가 지기 시작하니 급격하게 추워진다. 그리고 어두워져서 사진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여기 왜 왔나?




사진 669.jpg 빙하가 흘러내린 자국들

안나푸르나 봉우리들 저 아래로 빙하가 흘러내리고 남은 자국들이 무섭게 펼쳐져 있다. 가까이서 가보면 빨려들어갈 것처럼 무섭다. 롯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저기 떨어지면 찾을 수 없단다. 이곳은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이 있는 곳인 것 같다. 나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한 이곳을 왜 이토록 오고 싶어한 것일까?




사진 678.jpg 마차푸차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해가 안나푸르나의 높은 봉우리에 가려져서 이쪽은 완전히 밤처럼 어두운데 반대편 저쪽은 아직 찬란하다. 아직도 해가 비치는 마차푸차레가 아름답다. 사람들이 마차푸차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래서 몰골은 말이 아니지만 나도 한 방 찍었다. 씻지 못한지 며칠째이다. 샤워는커녕 세수조차 못하고 물티슈로 겨우 얼굴만 닦고 미지근한 물로 양치만 겨우 하는 수준이다. 인도여행할 때보다 더 하다. 게다가 가져온 모든 옷을 껴입고도 춥다. 저 아래쪽과는 완전히 다른 날씨다. 데우랄리까지는 낮에는 따뜻한 수준이었는데, MBC부터는 낮에도 춥다.




사진 685.jpg 행복한 나와 마차푸차레

그런데 나는 행복하다. 이상하지? 내가 자처하여 이렇게 힘든 곳에 올라와놓고 나는 행복하다. 행복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 힘든 곳에 와서, 그 힘든 고행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나는 행복하다. 도대체 왜...

이 감정을 행복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너무나 아름다운 설산과 장엄한 산 봉우리들을 보면서 가슴이 설레이고 그 힘들 길을 걸어 올라 왔다는 성취감도 느껴지고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천천히 걸어야만 하고 천천히 숨을 쉬어야만 하는 이 환경도 좋다. 평소에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들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이 깨달음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다. 여기가 내가 올라올 수 있는, 내 힘으로 올라올 수 있는, 제일 높은 곳이라는 생각에 지금의 이 시간이 얼마나 값진가. 한꺼번에 복합적인 여러 감정들이 뒤엉켜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행복감이 밀려든다.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한 답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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