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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팔이 Mar 26. 2024

유칼립투스 블랙잭 : 추억

  얘네들도 꽃말이 있어요? 꽃다발에 들어가는 (흔히 초록 풀이라고 부르는) 소재에 대해 안내해 드리면 간혹 돌아오는 질문이다. 사실 나도 꽃 일을 하기 전에는 몰랐다. 그린 소재들에도 모두 꽃말이 있다는 사실을.


  그중에서 오늘은 유칼립투스 블랙잭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우선, 유칼립투스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구니, 파블로 등 이파리 모양도 정말 다양하다.

다양한 유칼립투스 종류

블랙잭은 가장 대중적이고 흔히 알고 있는 전형적인 유칼립투스 종류다. 잔가지가 적고 줄기에 힘이 있어 꽃다발 제작 시에 지지용이나 공간 채우기용 소재로 선호도가 높다. 말랐을 때도 향과 모양이 잘 유지되어 드라이플라워로도 자주 사용한다.


  향도 모양도 오래 가기 때문일까? 유칼립투스 블랙잭의 꽃말은 ‘추억’이다. 추억이라는 단어를 마주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왠지 모르게 아련해지고 우수에 찬 눈동자로 먼 허공을 응시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가끔은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가수 신지훈의 ‘추억은 한 편의 산문집 되어’ 노래가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신지훈 정규1집 [별과 추억과 시]


  내가 신지훈을 듣게 된 것은 유튜브 뮤직 알고리즘 덕분이었다. 무언가 노래가 굉장히 그것도 심각할 정도로 내 취향이었다. ‘아니, 도대체 이분은 누구이며 이 곡은 무슨 노래지?’ 핸드폰을 두드려 아티스트와 곡명을 확인했다. ‘신지훈 - 가득 빈 마음에’. 앨범 커버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아! 유재하 곡을 커버한 거구나. 어쩐지 곡 감성이 장난 아니더라니.

제30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앨범 커버

난 그렇게 제대로 잘못 짚었었다. ‘가득 빈 마음에’는 신지훈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였다. 말도 안 돼. 이건… 유재하의 재림이다…!


  직접 쓴 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동안 발매된 신지훈의 노래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2022년 5월 발매된 정규 1집의 마지막 트랙, ‘추억은 한 편의 산문집 되어’를 들은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그녀의 음악성을? 아니다. 내가 덕통사고를 당했음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유재하, 김광석, 김현식이 한 명으로 응축되어 재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질문이 아니었다. 우리 지훈이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미끼였다. (덕질을 할 때는 나와 그녀를 하나로 간주하기 때문에 1인칭 복수형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잘 알겠으니 그만 좀 하라는 피드백이 중첩되던 시기에 신지훈 단독 콘서트 공지를 보게 된다. 갈까 말까, 가고 싶다, 가야겠다, 뭐 이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난 그냥 거기 가는 사람이었다. 이미 그렇게 결정된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서 갔다. 난 이미 신지훈을 꽤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또한 어설픈 착각이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든 첫 생각은… 망했다는 것이었다. 큰일났다. 뭐가 망했냐면 난 진짜 이렇게까지 지훈이를 좋아할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공연장에서 목도한 그녀는… 귀여운 타입이었다. 너무 귀여워서 갑자기 이 모든 세상에 분노가 일며 욕을 하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아, 그날을 회상하니 또 짜증이 난다. 그 정도로 정말이지 너무 귀엽다.


  ‘추억은 한 편의 산문집 되어’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우린 잃어버린 것도 없이 뭔갈 찾아 헤맸네’ 내가 잃어버리지도 않았으면서 찾아 헤매던 것은 신지훈의 음악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훈이의 음악은 너무나 크고 깊은 위로가 된다.


  지훈이의 가사는 대체로 외롭다. 나도 꽤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어서 그녀의 가사가 마음에 닿아 좋았다. 그런데 솔직히 이제 지훈이가 그만 외로웠으면 좋겠다. 나한테 그리고 대중한테 마음에 드는 음악 그런 거 안 해도 되니까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다. 잘 지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주르륵 들다가도 근데 내가 뭔데 감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하며 현실로 돌아오기 일쑤다. (덕질은 원래 이런 것 아닌가?)


  평생을 대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아티스트를 발견한 것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엄청난 행운이다. 지훈이의 외로운 음악이 추억이 되고, 또 새로이 추억으로 새겨질 노래들을 들려주길. 아니, 안 들려줘도 되니까 이제 너무 많이는 아프지 않길. 정말 내 온 진심으로 바란다.


2024.03.23

서울 망원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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