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들판 어디에 너는

삶의 길목에서 만난 노래-양희은 '상록수'

by 작은노래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저는 그때의 수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학교를 떠나가셨지요..."


아주 오래 전 20년 전이던가. 무심코 튼 라디오에서 이런 멘트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왠지 마음이 닿아 귀를 기울였다.


"그때 그 선생님은 저희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주셨어요. 지금도 이 노래는 제 가슴에 푸르게 살아 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그리운 000 선생님. 그때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노래 '상록수'를 다시 듣고 싶습니다."


화악! 가슴에 불이 그어진 느낌이었다. 나의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리고 10년 전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 교실, 학교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사연 속 아이들은 중학교 1학년 여학생들이다.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잠을 덜 자 피곤한 날에도 수업 한 시간만 하고 나오면 가뿐해졌다. 감기 기운이 있어 몽롱한 날에도 수업을 하고 나오면 상쾌했다. 교무실에서 언짢은 일이 있어도 교실에 들어가면 모두 털어내고 나올 수 있었다.


사실 나에겐 힘든 시절이었다. 전교조가 결성될 무렵이었기에 학교 안팎에서 부딪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아이들을 아끼고 멋진 수업 해보려고 하는 선생님들에게 감명을 받아 교사 모임에도 나가고, 교육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면 이름 하나 보태야지 했을 뿐이었지만,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한다는 것은 그리 작은 일은 아니었다. 힘없는 개별 교사의 목소리가 하나로 뭉친다는 거였으니.

하긴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이 부조리하다고 느껴 회의 시간에 말 한마디 하는 게 힘든 시절이었다. 신문에서는 의식화 교육이니 하면서 색깔론을 입히고, 엄청난 반정부 조직이 태동하는 것처럼 다루었다. 교사 집회 나갔다가 경찰차에 실려 간 일도 부지기수였다.


내 주변의 팽팽한 긴장감이 갑갑해 견딜 수 없는 날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런 나를 위안했다. 시를 읽으며 눈빛이 빛나던 아이들, 폐휴지를 줍고 다리를 절며 일하는 동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아이, ‘그대여 슬퍼하지 말아요.'라고 시작하는 괴테의 시를 낭송하며 지친 내 마음을 쓰다듬어주던 아이….

그때 아이들과 함께 한 국어 시간은 나의 천국이었다. 교사의 기쁨을 한껏 누리던 때였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게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이들은 울면서 매달렸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아이는 없었다. 내 책상에 쌓이던 편지들, 우편함을 채우던 편지들…. 마지막이라 여기며 해야 했던 여름방학 직전의 수업들….


그 여름이 가기 전, 아이들을 다시 만나기 전 나는 학교를 떠나야 했다. 개학을 사나흘 남긴 8월 18일.


그리고 그 뒤 가끔씩 아이들이 다 돌아간 밤, 학교 주변을 거닐다가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터뜨린 날도 있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복직을 하고 나서도 나는 그 학교 근처를 지날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아이들 편지를 통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도 알았다.


나의 대학 후배 되는 사람이 그만둔 내 자리에 강사로 왔었다. 아이들은 국어 선생님 대신 다른 선생님이 왔다며 그 강사 선생님을 괜히 미워했단다. 수업 시간 내내 딴청을 하고, 필통이나 다른 물건을 떨어뜨려 시끄럽게 만들고, 내 이야기를 하고, 선생님을 노려보고…. 결국 그 강사는 한 달 뒤에 그만두었다.


그런데…, 어린 학생들이 또 상처를 받았다. 이중의 상처를 받은 셈이었다. 피해자였던 자신들이 가해자가 되는 모순의 경험이 바로 상처였다.


나와 함께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 아이들, 나를 너무나도 따랐던 아이들, 나를 믿어주었던 아이들... 교사로 살면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준 아이들, 그때 내가 아이들과 함께 [상록수]라는 노래를 불렀었구나.


노래가 나오는 내내 그리고 한참 동안 나의 눈시울은 젖어 있었다. 10년 전의 그날들. 그리고 10년의 시간들.


방송이 끝난 뒤 나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그 프로그램 담당자를 찾았다. 이런저런 사연을 들었는데 그 사연을 보낸 사람을 알 수 있느냐고. 연락을 해주겠다던 담당자는 종내 연락이 없었다. 다시 전화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알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그 노래로 나와 아이들은 삶의 길목 어디에선가 만난다 여기며.



양희은 '상록수'

https://www.youtube.com/watch?v=9yfLg8ryS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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