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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각커피 Jan 06. 2022

회피형이 일을 처리하는 법

드디어 배달을 신청했다.

회피형 사람들이 모든 일을 다 미루진 않는다. 행동할 용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유독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일에는 엉덩이가 무거워 그 자리에서 절대 움직여지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강렬히 하고 싶을 때 그 행동력과 추진력이 다른 때보다 뛰어나게 발휘된다.)


마음속으로는 '해야 하는데..' 생각만 하는데 실천이 되지 않아 마음속 자신을 괴롭힌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괴로우면서도 우선 누워 핸드폰을 뒤적인다. 유튜브 '숏츠', 인스타 '릴스'와 '인기 피드'는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재밌고 짧은 영상들과 이슈들이 계속해서 재생되니 그냥 멍하니 그 영상들을 보며 해야 할 일에 써야 할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건 내 안에 단단한 벽을 망치로 강하게 부숴 허무는 것처럼 힘이 들고, 내 다리를 쥐고 놓지 않는 무언가를 세차게 뿌리치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나에게는 요 몇 달 몇 가지 숙제가 있었다. 10월부터 생각해 온 배달 신청, 11월 달부터 잉크가 나오지 않는 프린터기 수리, 12월에 고지된 너무 많이 오른 건강보험료 문의가 그 숙제들이었는데 정말 하기가 싫었다. 해야 하는 일인데 그 과정이 얼마나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알고 있어서 계속 미래의 나에게 내 할 일을 미뤘다.


'배달은 추워지면 시작할래.'

'프린터기 수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손님이 없는 날 한가 할 때 해야지.'

'건보료는 이번 달은 책 원고 마지막 교정이니까 책 출간하고 나면 그때 문의해 봐야겠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2월, 춥고 손님도 없고 책도 나온 한가한 날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딱! 바로바로 그날이었다. 그런데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또 미루고 미루다 할 일을 할 수 없게 된 저녁이 된 그날. 답답하고 이런 내가 화가 나서 노트를 펼쳐할 일을 적고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너 또 회피하냐?


번지 점프대 앞에 서서 망설이는 나를 뒤에서 누군가 탁! 하고 밀어주면 그 순간은 아찔하지만 떨어지고 나면 참 통쾌하고 시원할 것이다. 셰프가 만든 음식의 레시피에서 포인트로 주는 '셰프의 킥'처럼 내 행동력에 불을 지피는 킥이 되는 단어는 '회피'였다. '회피형 인간'에 대한 콤플렉스가 마음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어 스스로 또 회피하고 있다는 걸 직접적으로 목격하니 정신이 돌아왔다.


10월부터 미리 배달을 위해 배달용 컵, 랩, 디저트 박스, 유산지, 포장봉투 등을 미리 사두었다. 메뉴판에 들어간 사진도 시간 날 때마다 다 찍어둔 터였다. 마음의 준비만 필요했을 뿐, 사전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핸드폰을 켜고 전화 한 통이면 시작될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배달 주문은 걱정과 달리 분주하게 주문이 밀려들어오지 않았고, 며칠 전 날 잡고 처리한 프린트기 수리와 건강보험료 문의도 2시간 만에 모두 해결을 했다.


미루고 미뤘던 일을 하고 나니 항상 방 한 구석 쓰레기를 뭉쳐두고 모른 척 지나다녔다가 말끔히 치워낸 것처럼 상쾌하다. 앞으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는 바로 할 수 있을 거라 장담은 못하겠지만 조금씩 그 망설임의 시간을 줄여볼 생각이다.


적당한 망설임 덕분에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됐으니 '인간미'있게 조금의 망설임은 남겨두겠지만, 해냈을 때의 상쾌함과 '내가 해냈군!' 하는 자신감 뿜뿜한 감정을 잘 기억해 멋지게 '시작' 이란 번지 점프대에서 용감하게 뛰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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