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했다.
이게 대체 어디 있디?
미술사전 책장 사이에 접혀 있던데요.
미국으로 이민 가며 아들네 집에 맡겨둔 책 속에서 나왔단다.
정리했어도 벌써 정리해 치웠을, 사라졌어도 진작 사라져 없어졌을 여나믄 장의 퇴색된 종이가 어찌해 여태껏 보관돼 있었누.
당진 대구 부산으로 이사를 다니며 챙겨갖고 다녔다는 자체도, 책갈피에 끼워둔 것조차도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반백년이 지난 세월이다.
지금도 그 필체 변치 않아 졸필 그대로이지만 이 어찌 반갑지 않을손가.
해묵어 변색되고 바래버린 시간 앞에서 잠시 눈빛 아득해졌다.
뭉클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 아마 혼자였더라면 주책스럽게 눈가 물색없이 젖어버렸지 싶다.
그럴 만큼이나 오래 전인 푸르던 청년기, 생각잖았던 작은 추억의 편린들이 홀연 튀어나왔다.
하얗게 잊어버린 머나먼 시간과의 감회 어린 해후였다.
오래 잃어버리고 살았던 이름 하나 문득 다가서듯 너무 뜻밖이라 소회 각별하다기보다 망연해진다.
누렇게 빛바랜 종이를 이윽히 바라보며 회포에 젖어드는 눈길이 애틋해 보였던가.
아들이, 아예 표구해 드릴까요? 하기에 열적게 웃고 말았다.
당시 스물셋 나이, 고향인 지방학교에 첫 발령받은 미술교사였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솔개 병아리 채가듯 득달같이 모교에서 불러 3월 2일부터 근무하게 되었다.
연한 라일락 빛 슈트를 입고 얼굴 빨개진 채 부임 인사를 했으며 진녹색 베레모를 쓰고 간 봄 소풍 때는
영랑사 겹벚꽃 그늘에서 학생들과 어지간히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그해는 돌이켜 나의 화양연화였으며 동시에 생의 변곡점이 되던 해이기도 하였다.
연구수업은 유월에 잡혀있었지만 오월 거의 끝날 무렵에사 겨우, 풋내기 교사는 교안 다섯 장을 작성해 교무에게 제출했다,
윗선으로 또 그 윗선으로 줄줄이 결재를 받아야 하므로 한 달 전에는 완료돼야 하는 교안이었다.
당시 깐깐하기로 소문난 교무과장이지만, 여고시절 담임교사였다는 인연으로 오히려 교안 짜는데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덕에 거침없이 통과됐다,
왁스 먹여 매끄러운 등사 원지를 철판에 바르게 대고 철필로 글씨를 정서한 다음 일일이 가리방을 긁어 교사 수대로 인쇄된 학습지도안을 철해서 참고 자료로 미리 교사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교안이다.
초여름 더운 바람이 훅 불어오던 오후 수업 시간, 교실 뒤쪽에 교감 이하 교사진이 죽 둘러서서 수업을 참관하는 가운데 연구수업을 진행하면서 내심 꽤나 떨었다.
정식 무대에 서기 전 연습 반복하는 연극배우처럼 수차례 리허설을 거쳤음에도 처음 갖는 연구수업 시간이라서 내내 어이 그리 긴장되던지.
학생들에게 '달력 디자인' 구상을 미리 해오라는 당부를 해둔 데다 전원이 미술도구 등 준비물 착실히 챙겨 와 수업은 매끄러이 진행됐고 좋은 평점도 받았다.
두 번째 연구수업은 결혼하고 이태 지나 대구에서 충청도로 다시 올라와 복직한 남녀공학 학교에서 치렀다.
먼젓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때는 '관광포스터'를 통해 디자인의 개념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수업내용의 교안을 차근차근 미리 짜놓았다.
단원 설정 의도는, 순수미술의 종속적 위치에 있던 생활미술 자리를 소극적 미술 개념에서 빼보겠다는 나름 가상한 의도에서였다.
미술이 지닌 기능성을 미적 정서와 결합시켜 일상생활 속에 조화롭게 적용시킬 수 있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했으니 시골학교에서 딴은 앞서간 주제의 수업이었다.
그래픽 디자인이란 단어조차 아주 생소했던 당시였으니 어지간히 진취적이었다고나 할까.
변성기 지난 덩치 큰 남학생들이 진득이 앉아 색색 물감을 도안 위에 칠하자니 좀 꽤나 쑤셨을 터.
하지만 교사 또한 도입 5분, 전개 35분, 정리 5분, 평가 5분, 적절히 배분하며 진행해야 하는 50분의 연구수업을 마치고 나자 잔등에는 땀이 배어있었다.
요새도 각급 학교에서 전 교사가 참관하는 연구수업이란 걸 할까?
지금은 거의 대부분 A4용지처럼 새하얀 고급 종이를 쓰지만 70년대 학교에서 사용하는 종이는 지질이 낮은 백노지라 불리던 갱지였다.
컴퓨터에서 워드프로세서로 문서작성을 하고 엔터키를 눌러 자동 프린트기로 척척 문서를 뽑아내는 요즘에야 생소한 가리방.
1970년대 무렵엔 학교나 관공서에서 자연스레 접하게 되던 아주 흔한 일로 당시 '등사실'이라는 작업 공간이 별도로 있었다.
줄판에 습자지처럼 얇은 기름종이를 얹고 철필로 글씨를 쓰는데 이래서 달필 아닌 필체일지라도 고대로 보존된다.
등사기의 고운 철망에 등사 원지를 끼워 넣은 다음 밑에 인쇄할 종이를 반듯하게 깔아놓아야 한다.
등사판인 가리방 위에서 등사잉크를 묻힌 롤러를 밀어 한 장씩 찍어내는 수작업으로 그 많은 시험지를 인쇄했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손에 묻던 새카만 등사잉크의 독특한 내음 이젠 희미해지다 못해 아리송해졌는데 그때 그 시절 내가 쓴 인쇄물을 이렇게 만나다니....
학생시위가 빈번한 시대라 데모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격문 같은 유인물이나 굵은 글씨체의 전단지를 찍어봤을 테고.
펄프를 원료로 하여 만들어진 종이는 공정 과정에서 종이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첨가물이 들어가게 된다.
위 종이처럼 색 변화에 영향을 주는 성분은 리그닌이라는 지용성 페놀 때문이라고 한다.
이 리그닌이 대기 중 산소와 자외선에 의해 산화 및 광화학반응이 일어나면서 종이 색을 누렇게 변화시킨다고.
해서 고급 종이는 공정 과정 시 이 리그닌을 제거시켜 만든다고 한다.
신문용지는 아직도 갱지를 쓰지만 이제는 그 외 모든 곳에서 백색도(白色度)가 높은 새하얀 백상지를 주로 쓴다.
반면 갱지는 기름 흡수가 잘 돼 잉크의 건조가 빠르므로 하급 인쇄용지로 지금도 요긴히 쓰이고 있다.
이렇듯 제각각 알맞은 쓰임새가 있으나 근자같이 빠르게 변모하는 세상이라면 또 어떤 혁신적인 종이가 태어나 놀라게 될까.
3D 프린터기로 뽑아낸 글씨가 또 어떻게 해묵어 바래게 될지 그 세월도 역시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