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
때는 19세기 중엽. 인도양을 동진하다 북상한 프랑스 세력이 마침내 적당한 꼬투리를 잡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발을 딛었더랬소. ‘책들의 뛰어난 인쇄술과 글자를 금으로 상감한 수많은 책들을 다시 경첩과 걸쇠로 장식한 제본술에 감탄했다. 프랑스군은 앵발리드 기념관을 위해 이 중에서 가장 멋진 것들을 상당수 가져갔다’고 그 당시 상황을 상세히 형에게 써 보냈던 리델 신부의 편지글이 근자에 공개된 바 있소.
거세게 밀어닥치는 외세의 침투를 물리치고자 쇄국 정책을 쓴 대원군이 아홉 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의 신도들을 처형시킨 병인년의 천주교 박해 사건. 그 병인 사옥의 책임을 묻는다는 명목으로 함대를 이끌고 온 프랑스 군대의 길잡이 겸 통역이었던 리델은 조선에서 선교 활동 중 사옥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했던 사람이라 하오.
강화도의 갑곶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우리에게는 곧 침략자였소. 무자비한 살상, 파괴와 약탈을 수반하기 마련인 전쟁. 프랑스군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 왕실의 피난 시 궁궐인 강화 행궁을 비롯하여 강화의 여러 시설들에 방화하고 외규장각의 소장품인 다수의 도서 등을 약탈해 갔소. 이것이 이른바 병인양요라 불리는 역사상의 사실로 일천팔백육십육 년의 일이었다 하오.
한참 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을 하며 조선 시대의 귀중한 고문서 다수를 반환한다는 낭보를 전했더랬소. 건국 이래 최대 사업으로 꼽히는 경부 고속 전철의 차종이 프랑스의 초고속 열차 테제베로 선정, 공식 발표된 지 불과 며칠 상관에 우연인가 모르지만 문화재 반환 소식을 알렸던 거요. 그간 우리 정부가 유네스코 등의 국제기구를 통해 문화재 반환을 위한 외교활동을 꾸준히 추진해 온 결과임에도, 이는 왠지 국책사업에 따른 일종의 반대급부라는 인상 짙게 받았던 것이 사실이오.
병인양요 때 노획해 간 전리품이 분명한 그 약탈 문화재를 큰 선심 쓰듯 내놓는 프랑스. 그것도 ‘영구 임대’라는 껄끄러운 꼬리표를 달았음에도 빼앗긴 내 물건을 되찾는다는 감격 때문인지 신문들은 연일 그 소식을 신이 나서 떠들어 대더이다. 물론 해외에 반출되어 있는 문화재의 환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던 일이오. 그래서 전례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와 반발 여론이 프랑스 내에서 상당히 높았다 들었소.
자기네 조상의 얼이 깃든 문화유산은 제 나라에 보존됨이 응당한 이치이나 실정은 그렇지만도 않은 게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오. 우리의 경우 해외에 나가 있는 문화재가 오만 사천여 건에 이른다니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소. 그 이면에는 밝히기를 꺼리는 일부 박물관과 개인 소장품 등 파악이 안 된 것인들 또 얼마나 많겠소. 문화재 유출 경위는 우리가 일본에 당했던 예와 마찬가지로 탐욕스러운 정복자들이 탈취해 간 전리품이 대부분 아니던가요. 대영 박물관을 가득 채운, 거의 모든 유물들이 이집트 등지에서 실려 왔지않소. 루블 박물관 역시 그리스며 다른 힘없는 나라로부터 강탈한 미술품들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오.
이번에 반환되는 고문서의 양이 빼앗아 간 유물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강화 문화원. 반면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동양 고문서 관리 책임자인 여직원 두 명은 울며불며 한사코 책을 못 내놓겠다 소동을 부렸다지요. 끝내는 항명성 사임까지 불사 했다는 외신이 보도되기도 했소. 프랑스인이 아닌 나로서는 쓴 커피를 마신 기분일 수밖에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문제를 보는 시각과 견해는 서있는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법. 지정학적 조건 운운하며 침탈당한 역사에 대해 변명을 앞세우지 말고 어쨌거나 내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힘은 키우고 볼일이오. 힘이 없으면 당할 수밖에 없고 당하면 억울하고 분한 일뿐 아니겠소.
일찍이 대륙의 중국으로부터 또는 섬나라 왜로부터 나중에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피 흘려야 했던 수난의 역사. 문화의 보존 계승 발전은커녕 일제에 강점당하는 비운에 뒤이어 민족 분단의 설움을 겪으며 혼신의 노력으로 폐허 위에 경제 부흥과 도약의 발판을 다져 나가는 중인 우리. 이제야 겨우 자신을 돌아보고 뿌리를 찾는 작업도 생각해 볼 만한 시점에 와 있는 우리요. 동시에 우리의 역사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눈 돌려 볼 여유도 생겼던 거라오.
오래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 등이 강화에서 고서들을 약탈해 가며 언급한 바 있던 앵발리드 기념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두가 이리 길어졌소. 앵발리드는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곳이자 군사학에 관한 여러 자료가 전시된 라미 박물관을 포함하는 곳으로 파리의 바렌느 역 인근에 있다고 들었소. 세계 정복의 야심가였던 나폴레옹을 위하여, 그대 추앙하는 후배들의 지극한 충성심 탓에 꼬레의 왕실 고문서 다수가 프랑스 군함에 실려 제 나라를 떠났던 거요.
유럽 여행 중 파리에 닿은 날은 공교롭게도 프랑스의 가장 큰 국경일인 혁명 기념일 바로 다음 날이었소. 축제의 뒤 끝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몽마르트르 언덕의 사크레쾨르 사원 앞은 퍽 어수선했소. 사방에서 부산하게 터지는 폭죽, 발길에 차이는 샴페인 병, 신문 쪼가리와 빈 깡통투성이의 무질서함에 혼란감이 일더이다. 저 약간은 퇴폐적이고 제멋대로인 듯한 프랑스인 핏속 어디에 혁명의 뜨거운 정열이 숨어 있었는지 의아심이 들 정도로 거리는 나른히 들떠 있었소.
절대 왕정의 압정과 봉건 귀족들로부터 끝없이 착취당하고 살았던 다수민들이 지배 계급의 횡포에 맞서 힘을 합해 압제자를 물리치고 주권을 쟁취한 프랑스인. 그들은 모든 사람이 골고루 평등한 권리와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위대한 국민이기도 했소. 우리의 동학 혁명이 그러했듯 쌓이고 쌓인 불만이 폭발한 그날. 분노에 찬 시민들이 군사 요새이자 국사범을 가두는 감옥인 바스티유를 습격하여 점령함으로 자유와 평등의 시대를 맞았던 거지요. 이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혁명 광장에서 처형되고 수많은 귀족들이 단두대에 목을 잃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소.
피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향한 디딤돌은 놓았으나 혁명기의 혼란스러운 와중에 유럽 동맹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프랑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일어선 의용군들이 남 불의 마르세이유에서 파리를 향해 행군하며 부르던 라 마르세예즈는 오늘날까지 프랑스 국가로 불리고 있다 하였소. 유럽 여러 국가와 상대해 전쟁을 치르느라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하에 희망의 빛으로 프랑스 국민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보나팔트 나폴레옹 그대였소.
뛰어난 전술로 유럽 대륙을 평정하고 황제에 올라 프랑스의 권위와 위신을 크게 떨친 나폴레옹. 알렉산더 및 카이사르의 이름과 함께 세계 역사상 이름 높은 영웅인 나폴레옹 그대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영웅이지만 존경받는 영웅은 못된다지요. 자신의 야심을 위해 프랑스를 전쟁에 몰아넣은 독재자로 평가되는 그대는 지금 앵발리드에 누워 남가일몽의 허무를 되씹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소.
파리에서의 이틀째는 일찌감치 베르사유 궁의 호사를 접하고 에펠탑에 올랐더랬소. 거의 백 년 전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고자 세웠다는 파리의 명물 에펠탑. 철제 탑 상층부까지 엘리베이터에 실려 올라보니 저 아래 유람선을 띄운 센 강이 진녹색으로 빛나고 있었소. 사방을 돌며 내려다본 파리 전경은 곳곳이 경탄을 자아내게 했소. 특히 사이요 궁의 분수와 호수, 꽃밭이 어우러진 정원은 훌륭한 조경술로 마치 수놓은 양 꾸며져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신음처럼 터졌소.
녹색 포스터처럼 명료한 조형미가 뛰어난 샹드 마르스 공원의 푸른 잔디밭과 울창한 수목들은 또 얼마나 멋지던지요. 마르스 공원에서 한 블록쯤 지나 몽파르나스로 뻗은 대로상의 짙푸른 가로수를 조금 비껴선, 시옷 (ㅅ) 자 모형의 생김새가 특이한 건물은 유네스코 본부였고 그 가까이에 앵발리드 기념관은 자리하고 있었소. 하지만 삼 일간의 한정된 일정에 볼거리가 무진장인 파리에서 굳이 전쟁, 군사 관계의 무거운 색채와 대면하고 싶지 않아 앵발리드는 간단히 일별하고 말았더랬소. 솔직히 나폴레옹 그대보다 더 만나고 싶은 이가 바로 곁 로댕 미술관에서 나를 기다린 때문이라오.
<생각하는 사람>이 선 정원 사이로 금빛 찬연한 앵발리드 기념관의 돔이 다시 보였소. 유럽에서야 흔한 것이 돔 양식이지만 석양을 받아 번쩍이는 금빛 치장의 돔 건물은 일단 눈에 띄게 돋보였고 위엄마저 느끼게 했소. 17세기 고전예술의 극치라는 격찬이 호들갑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잔광 머뭇거리는 소르본 대학으로 향했었지요. 방학이라 굳게 문 잠긴 대학 앞 카페에서 청한 한 잔의 홍차. 그때의 홍차향은 꽤 근사했던 걸로 기억하오만 오늘은 어떤 차라도 쓰디쓸 거 같다오. < 유네스코 회지 93>